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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21
한자 張錫藎
영어공식명칭 Jang Seoksin
이칭/별칭 장석기(張錫夔),순명(舜鳴),과재(果齋),일범(一帆),장동한(張東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정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1년연표보기 - 장석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4년 - 장석신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98년 - 장석신 통정대부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900년 - 장석신 비서원 승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1년 - 장석신 중추원 의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장석신 퇴임
활동 시기/일시 1903년 - 장석신 『남선록(南選錄)』 집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장석신 『일록(日錄)』 집필
몰년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장석신 사망
거주|이주지 장석신 거주지 -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
묘소|단소 장석신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인동(仁同)
대표 관직 비서원 승(秘書院丞)

[정의]

근대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순명(舜鳴), 호는 과재(果齋)·일범(一帆), 초명은 장석기(張錫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금헌(噤軒) 장주(張鑄)이고 할아버지는 장빈(張濱)이며, 아버지는 형조참판을 지낸 운고(雲皐) 장시표(張時杓)[1819~1894]이다. 어머니는 청주 정씨(淸州鄭氏)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후손인 정완(鄭垸)의 딸이다. 동생이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다. 아들 장희원(張憙遠)을 두었다.

[활동 사항]

장석신(張錫藎)[1841~1923]은 집안 어른인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1815~1900] 문하에서 수학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와 교유했으며 서울에 올라가서는 만성(晩惺) 박치복(朴致馥), 위사(韋士) 이근수(李根洙), 영재(寗齋) 이건창(李建昌) 등과도 교유했다. 1882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94년 문과에 급제했다. 사헌부 정언(正言)·홍문관 수찬(修撰)·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1898년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0년에 비서원 승(秘書院丞)이 되었다. 1901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올랐다. 장석신은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지만 십 년도 못 되어 1902년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이후 영남 지역의 산수를 돌아다니며 저술에 힘썼는데, 그의 저작에는 나라를 잃은 선비의 비분강개한 마음이 곳곳에 드러난다. 1903년 『남선록(南選錄)』을 집필했고, 1904년에는 『일록(日錄)』을 집필했다.

1905년 을사오적이 왜병을 이끌고 대궐 안에 들어와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협박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협약 철회와 적신(賊臣)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일제가 대한 제국을 강제 병합하여 국권이 상실되자 이름을 장동한(張東翰)으로, 호를 일범으로 바꾸고 가야산 남쪽 추동(楸洞)에 들어가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일본인들이 은사금으로 재차 회유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장석신은 국권을 상실한 가운데에서도 역사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행했던 나름의 독립운동이었다고 추측된다.

[학문과 저술]

저술로는 『과재문집(果齋文集)』[『과재선생문집(果齋先生文集)』] 11권 5책, 『해동악부사(海東樂府詞)』,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동화세기(東華世紀)』, 『남선록(南選錄)』, 『두문동유사(杜門洞遺史)』, 『일록(日錄)』 등이 있다.

[묘소]

‘읍치(邑治) 서쪽 40리 묵방산(墨方山)’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지역인 것으로 추측된다. 장석영이 묘갈명을 지었다.[「선형 통정대부 비서원 승 부군 묘표(先兄通政大夫秘書院丞府君墓表)」]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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