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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692
한자 李廷賢
영어공식명칭 I Jeonghyeon
이칭/별칭 원로(元老),월봉(月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7년연표보기 - 이정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이정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이정현 승문원 정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12년연표보기 - 이정현 사망
출생지 이정현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이정현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사당|배향지 월봉정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성산
대표 관직|경력 승문원 정자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원로(元老), 호는 월봉(月峰). 증조할아버지는 이발(李勃), 할아버지는 이성범(李成範)이다. 아버지는 이약(李若)이고, 어머니는 상주 김씨 김눌(金訥)의 딸이다. 부인은 우봉 이씨(牛峰李氏) 참봉 이효삼(李孝參)의 딸이며, 우의정 정언신(鄭彥信)의 외손녀이다.

[활동 사항]

이정현(李廷賢)[1587~1612]은 1587년(선조 20)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삼익재(三益齋) 이천배(李天培)에게 배웠고, 약관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고 고제(高弟)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했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지원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을 비평했던 북인 대북 세력의 원로격인 정인홍(鄭仁弘)을 비판하였다. 당시 사류의 많은 사람들이 정인홍의 정치적 행위와 이황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 놀라고 분통스러워 했으나, 항의하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정현은 홀로 글을 남겨, “인륜은 무너뜨릴 수 없고 천리도 없앨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정현은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기옹(畸翁) 박공구(朴羾衢) 등과 친밀했고, 한개 마을이정현 때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반촌 중 하나이자 성주 이씨 집성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본래 한개 마을에 처음 정착한 성주 이씨는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였다. 이정현은 이우의 6세손이고, 한개 마을성산 이씨 중 최초의 문과 급제자이다. 그러나 문과 급제 후에 외아들 한포(寒浦) 이수성(李壽星)만을 남겨 둔 채 2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오늘날의 천연두에 해당하는 두질(痘疾)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24세이던 부인 우봉 이씨는 마을에 계속 거주하기로 결정했고, 후에 아들 이수성은 부인 성산 여씨와의 사이에 4남 5녀, 순천 박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지금의 한개 마을을 구성하는 4개 파는 이들에게서 비롯되었고, 마을 공동 재실의 이름이 월봉정(月峯亭)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 한개 마을성산 이씨의 집성촌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봉 이씨의 공이 컸다. 묘지명을 지은 이진상 역시 우봉 이씨가 집안을 엄숙하면서도 화목하게 다스렸고, 사람들이 모두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동쪽 조암(祖巖)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증직하였다. 이규진(李奎鎭), 여팔권(呂八拳)이 묘갈명을 짓고, 이진상(李震相)이 묘지명을 찬했다. 비슷한 연배였던 분사(汾沙) 이성구(李聖求)와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 이정현 사후에 만사(輓詞)를 지어 애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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