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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545
한자 淸州鄭氏
영어공식명칭 Cheongju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청주 - 충청북도 청주시
입향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마을 지도보기
성씨 시조 정극경
입향 시조 정사중

[정의]

정극경을 시조로 하고, 정사중을 입향조로 하는 성주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청주 정씨(淸州鄭氏)는 시조가 고려 의종 때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정극경(鄭克卿)이며, 6세손 정책(鄭㥽)의 아들인 정오(鄭䫨)와 정포(鄭誧)에 이르러 처음 분파하였다. 경상북도 성주의 청주 정씨는 정포의 손자인 조선 개국공신 문민공(文愍公) 복재(復齋) 정총(鄭揔)의 후손이다. 대대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김굉필(金宏弼)의 외손자였던 14세손 정사중(鄭思中)이 현풍 외가에 있으면서 성주 이씨와 결혼하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柳村)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사중은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을 지냈고, 아들 세 명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정괄(鄭适), 둘째 아들은 정곤수(鄭崑壽), 셋째 아들은 정구(鄭逑)이다. 둘째 아들 정곤수는 대호군 정승문의 양자가 되었고, 자손들이 경기도 장단에 살고 있다. 셋째 아들 정구는 호가 한강(寒岡)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로 대성한 유학자이다. 자손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지촌, 대가면 칠봉리 유촌, 성주읍 삼산리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정구가 만든 회연서당은 나중에 유림에 의해 회연서원(檜淵書院)[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이 되었다.

[입향 경위]

시조 정극경의 14세손인 입향조 정사중은 김굉필의 외손자였고, 현풍 외가에 있으면서 성주 이씨인 이환(李煥)의 딸과 혼인하여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유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현황]

경상북도 성주의 청주 정씨대가면 칠봉리 유촌, 성주읍 삼산리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에 회연서원이 있다.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 정구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해 1622년(광해군 14)에 창건되었고, 1690년(숙종 16) 사액(賜額)을 받았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했고, 매년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한강 정구를 주향으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으로 모시고 있다.

건물은 3칸의 사우, 6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와 서재, 비각, 신도비 등으로 되어 있다.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鄭逑神道碑)[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는 원래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갓말 마을 뒷산인 창평산 묘소 부근에 있었으나, 1668년(현종 9) 회연서원 안으로 옮겼다. 비문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었고, 글씨는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전서는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이 썼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오천길 85에는 사창서당(社倉書堂)[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이 있다. 1591년(선조 24)에 정구가 모옥사숙(茅屋私塾)을 지어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1796년(정조 20)에 정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다시 건립하였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양측에는 온돌방을 두고 앞쪽에 툇마루를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되어 있다. 좌측의 방은 ‘낙영재(樂英齋)’, 우측의 방은 ‘숭교재(崇敎齋)’라 하였다. 숭교재의 상부에는 대청 쪽으로 문을 달아 이용하는 다락을 설치하여 서고로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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