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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434
한자 晴川書堂
영어공식명칭 cheongcheonseodang
이칭/별칭 성주 청천서당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66-7[칠봉리 53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 청천서원 창건
문화재 지정 일시 1991년 5월 14일연표보기 - 청천서당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지정
현 소재지 청천서당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66-7[칠봉리 532]지도보기
원소재지 청천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66-7[칠봉리 532]
성격 서당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당.

[개설]

청천서당(晴川書堂)은 처음에 서원으로 건립되었으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을 향사하고,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1535~1603]·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1547~1622]을 종향하였다.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후진 양성을 위한 교사로 활용하였다. 중정당에 백록동서원의 원규가 걸려 있다.

김우옹은 본관이 의성(義城)으로,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思道谷)에서 태어났다. 성주 지역에서 정구와 함께 양강(兩岡)으로 불리며,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지냈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석방되었다. 박이장은 본관이 순천(順天)으로,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윤동 마을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종사하였고, 인목 대비(仁穆大妃)와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시를 지어 정인홍(鄭仁弘)과 절교하였다. 김우옹과 함께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담수는 본관이 의성(義城)으로,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윤동 마을에서 태어났다. 효우(孝友)와 학행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노수신과 조식의 직전 제자(直傳弟子)였다.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성주 지역으로 유배를 오자, 김담수이문건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덕계 오건에게 수학하고 금계 황준량과 강학하면서 김우옹 형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정구와 도의의 관계를 맺었다. 김창숙은 본관이 의성이고,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과 교육에 힘썼으며, 8·15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항거하였다.

[위치]

청천서당은 성주군 대가면 칠봉2길 66-7[칠봉리 532번지]에 있다. 사월 경로당과 마주 보고 있으며, 의성 김씨 재실(義城金氏齋室) 옆에 자리한다. 근처에 심산 김창숙 생가(心山金昌淑生家)가 있다. 대가면 행정복지센터에서 남쪽 칠봉산 방면으로 약 1.4㎞ 직진하면 나온다. 성주군청에서 칠봉산 방향으로 약 6.2㎞ 떨어진 곳에 있다.

[변천]

청천서당은 1729년(영조 5) 사림에 의해 청천서원(晴川書院)으로 창건되었다. 고종 대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이후 김우옹의 후손 김호림(金護林)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하였다. 서당으로 중건된 후 1910년(순종 4) 봄에 김호림의 아들 심산 김창숙이 교육 구국 운동으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사로 활용하였다.

[형태]

장방형 토석 담을 둘렀으며, 서쪽에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지붕 서당을 배치하였다. 그 전방에 3칸 대문채와 남쪽에 3칸 ‘一’ 자형 관리사가 있다. 서당 담장 밖 북쪽에는 김우옹의 불천위 사당이 방형 토석 담 안에 자리하고 있다.

[현황]

청천서당은 1991년 5월 14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청천서당김우옹을 중심으로 성주군에서 학문으로 뛰어난 인물들을 배향한 곳이자, 성주 사림 활동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힘쓴 성주군의 유학자 김창숙이 후진을 양성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적·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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