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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401
한자 金昌集受命遺墟碑
영어공식명칭 kim Chang-jip Stele, Seongju
이칭/별칭 몽와 김창집 수명유허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23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50년연표보기 - 김창집 수명유허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11년 - 김창집 수명유허비 이전
보수|복원 시기/일시 2003년 - 김창집 수명유허비 보수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48년연표보기 - 김창집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22년 4월 29일연표보기 - 김창집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3년 - 김창집 수명유허비 신비 건립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231 지도보기
원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지도보기
성격 유허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김창집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97㎝[높이]|47㎝[너비]|20㎝[두께]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김창집을 기리기 위해 1750년에 세운 비.

[개설]

조선 후기 문신인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다. 1684년(숙종 10)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 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71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1721~1722년에 걸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722년 성주로 이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몽와집(夢窩集)』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건립 경위]

김창집 수명유허비(金昌集受命遺墟碑)는 역모죄로 성주로 유배되어 사사된 노론 4대신 중의 한 명인 김창집을 기리기 위해 1750년 5월 사사의 명을 받은 자리에 건립되었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231번지에 위치한 김창집 수명유허비는 서석준 장관 생가 터 청사 기념관 뒤편, 사골에서 세록골로 넘어가는 길 좌측에 충헌각 안에 세워져 있다.

[형태]

김창집 수명유허비는 여러 번 파손되고 복원되는 과정에서 비신만 남아 있으며 크기는 높이 97㎝, 너비 47㎝, 두께 20㎝이다. 상부는 둥글게 마감하였고 전면에 비문을 새기고 음각된 글자에 붉은색을 넣었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는 ‘의정부 영의정 충헌 김공 창집 수명유허비 숭정 삼경오 오월 일(議政府領議政忠獻金公昌集受命遺墟碑 崇禎三庚午五月 日)[의정부 영의정 충헌 김창집 공의 수명유허비 숭정 세 번째 경오년 5월 일에 세우다]’이라고 새겨져 있다. 숭정 세 번째 경오년은 1750년을 가리킨다.

[현황]

1750년 성주읍성 동문 밖에 건립되어 있던 것을 1911년 대구로 가는 길을 내면서 남문 밖으로 이전하였다. 6.25 전쟁 당시 파손된 비를 수습하여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3리 옛 성황당 자리로 이전 복원하였으나, 다시 파손되어 2003년 현 위치로 옮기면서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비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오래되고 깨어져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자 오석으로 된 새 유허비를 조성하고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충헌각을 건립하였다. 새로 조성한 유허비 뒤에 맞대어 구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문신인 김창집을 기리고자 건립한 유허비로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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