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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90
한자 星州世宗大王子胎室
영어공식명칭 Placenta Chambers of King Sejong's Sons, Seongju
이칭/별칭 선석산 태실,세종대왕자 태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심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438년연표보기~1442년연표보기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1975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3월 6일연표보기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사적 지정
문화재 해지 일시 2003년 3월 6일연표보기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해지
현 소재지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지도보기
성격 태실
관련 인물 세종(世宗)[1397~1450]|단종(端宗)[1441~1457]|세조(世祖)[1417~1468]|안평 대군(安平大君)[1418~1453]|임영 대군(臨瀛大君)[1420~1469]|광평 대군(廣平大君)[1425~1444]|금성 대군(錦城大君)[1426~1457]|평원 대군(平原大君)[1427~1445]|영응 대군(永膺大君)[1434~1467]|화의군(和義君)[1427~1464]|한남군(漢南君)[1429~1459]|밀성군(密城君)[1430~1479]|수춘군(壽春君)[1431~1455]|익현군(翼峴君)[1431~1463]|영풍군(永豊君)[1434~1457]|영해군(寧海君)|왕자 당
면적 5,950㎡
소유자 대한민국
관리자 성주군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태봉에 있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왕자 18명과 세손 단종의 태실.

[건립 경위]

세종대왕자 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은 1438년(세종 20)~1442년(세종 24)에 조성하였다. 출생한 순서에 따라 설치한 것이 아니라 태실(胎室) 조성의 적기가 아니면 자리를 비워 두고 조성하였는데, 이는 계획적으로 마스터 플랜을 갖고 조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원래 세종대왕자 태실 주변에 성주 이씨(星州李氏) 중시조인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으나 옮기게 하고 태실을 조성하였다.

[위치]

세종대왕자 태실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에 있다. 선석산(禪石山)[해발 742.4m]을 주산으로 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끝에서 삿갓 모양으로 솟아오른 태봉(胎封)[해발 258.2m]의 정상에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돌혈(突穴)에 해당하는 명당 자리이다. 주변에는 태실의 수호 사찰로 알려진 선석사(禪石寺)가 있다.

[형태]

면적은 5,950㎡이다. 세종의 아들 18명과 원손인 단종(端宗) 등의 태실 19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기 태실[阿只胎室]과 가봉 태실(加封胎室)이 함께 존재한다. 아기 태실은 지하에 방형의 태함(胎函)을 묻고 태함 안에 태지석과 태호를 안치하였다. 지상에는 일반적으로 반구형의 봉토를 하고 아기비를 세우는데, 세종 대왕 자 태실에서는 봉토 대신 개첨석·중동석·사방석으로 구성된 중앙 태석을 설치하였다. 가봉 태실은 세조(世祖) 태실이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가봉 태실은 지상에 중앙 태석을 두고 주변으로 팔각 난간석을 화려하게 설치하는데, 세조 태실은 기존 아기 태실에 가봉비만 설치하였다. 특히 이곳 태실의 태호는 내호·외호 이중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상황과 달리, 맨 밑에 대접을 두고 그 위에 작은 호를 올린 후 다시 그 위를 큰 대접으로 덮었다.

[현황]

태봉에는 세종의 아들 중 문종(文宗)을 제외하고 세조를 비롯한 18명의 왕자[대군 7기, 군 11기]와 원손[단종]의 태실이 있다. 각 태실은 앞뒤 두 줄로 배치되었는데, 앞 열에는 동쪽부터 화의군(和義君), 계양군(桂陽君), 의창군(義昌君), 한남군(漢南君), 밀성군(密城君), 수춘군(壽春君), 익현군(翼峴君), 영풍군(永豊君), 왕자 장, 왕자 거, 왕자 당의 순으로 11기의 태실이, 뒤 열에는 진양 대군, 안평 대군(安平大君), 임영 대군(臨瀛大君), 광평 대군(廣平大君), 금성 대군(錦城大君), 평원 대군(平原大君),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순으로 7기의 태실이 있으며, 뒤 열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원손인 단종 태실이 위치한다. 그런데 세종 대왕 자 태실에는 영해군(寧海君)[당·장]의 태실이 2기 있다. 그동안 왕자 당과 왕자 장은 왕실 족보에서 동일 인물인 영해군의 아명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태실에서 출생일이 다른 것으로 밝혀져 왕자 당은 영해군[장]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왕자로 밝혀졌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안평 대군과 금성 대군, 화의군, 한남군, 그리고 영풍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 석물은 파괴되어 있는데, 1977년에 태실을 보수 정비하던 중 태호와 태지석 등이 일부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1975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하였다가, 2003년 3월 6일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해제와 동시에 사적으로 승격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전기 태실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나라에서 왕자 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에 따른 왕실 태실 조성 방식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태실 중 보존이 가장 잘되어 있으며, 특히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조선 전기의 태실 양식과 구조를 잘 보여 준다. 또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이 함께 존재하며, 19기의 태실이 한곳에 군집을 이룬 가장 큰 규모의 태실로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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