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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87
한자 宋希奎旌閭碑
이칭/별칭 야계 송희규 정려비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 892-7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소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65년연표보기 - 송희규 정려비 건립
보수|복원 시기/일시 1659년 3월 - 송희규 정려비 복원
보수|복원 시기/일시 1908년 4월 - 송희규 정려비 보수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94년 - 송희규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58년 - 송희규 사망
현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 892-7 지도보기
성격 정려비
양식 입비
관련 인물 송희규
크기(높이, 너비, 두께) 137㎝[높이]|55㎝[너비]|27㎝[두께]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송희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565년에 세운 비.

[개설]

송희규(宋希奎)[1494~1558]의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倻溪)·야계산옹(倻溪山翁),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원래 시조 때부터 합천 야로(冶爐)를 중심으로 살았으나, 9세손 송구(宋構)[?~?]가 경상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하면서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에 입향하였다. 송희규는 성주 문인 도형(都衡)[1480~1547]에게 수학하였으며,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이후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윤원형(尹元衡)[?~1565]의 전횡을 탄핵했다가 유배당하였는데, 풀려나와 성주로 돌아와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 저서로 『야계집(倻溪集)』 등이 있다.

[건립 경위]

송희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지극히 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애와 공경이 돈독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565년(명종 20)에 정려(旌閭)와 효우비(孝友碑)가 내려졌다. 1659년(효종 10) 3월 돌에 새겨 다시 세우고, 1908년(순종 2) 4월 추증된 시호를 고쳐 썼다.

[위치]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리 892-7번지에 위치해 있다. 송희규가 거처하던 백세각과 떨어진 곳에 있는데, 대고로를 따라 동포로3길로 들어가면 동포2리 마을이 있고, 이 마을 바깥쪽에 위치해 있다.

[형태]

높이는 137㎝, 너비는 55㎝, 두께는 27㎝이다. 원래 있던 정려비 옆에 충효각(忠孝閣)이라 쓰인 비각과 정려비를 새로 지었다.

[금석문]

비의 전면에 ‘효자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행 사헌부 집의 시충숙공 송희규지려(孝子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司憲府執義諡忠肅公宋希奎之閭)’라고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송희규는 효경충신(孝敬忠信)을 실천한 성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효우로 이름이 알려져 정려를 세운 일이나, 의(義)로운 성품을 바탕으로 당시 외척으로서 득세한 윤원형을 탄핵하여 유배당한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한편, 송희규의 행적 가운데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뒤 성주로 돌아와 지은 백세각이 매우 주목된다. 훗날 1919년 3.1 운동 당시 후손인 송준필(宋浚弼)[1869~1943]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에 의한 성주 만세 운동과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 장서 작성을 위한 모임의 장소로 활용된 바 있기 때문이다. 2004년에는 이러한 애국혼을 기리기 위해 백세각 입구에 항일 의적비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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