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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가 건설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49
한자 新國家建設運動(星州)
영어공식명칭 New National Construction Movement(Seongj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연표보기 - 신국가 건설 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48년 8월 15일연표보기 - 신국가 건설 운동 종료
발단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 광복
발생|시작 장소 신국가 건설 운동 - 경상북도 성주군
종결 장소 신국가 건설 운동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성주면 치안유지회|성주군 인민위원회|조선인민당 성주지부|한국민주당 성주군지부|민주주의민족전선 성주군위원회|대한독립촉성 성주국민회|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한국민주당 성주군지부

[정의]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때까지 성주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 수립 운동.

[역사적 배경]

신국가 건설 운동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성주에서도 성주면 치안유지회의 결성을 시작으로 각 면에서 유사한 성격의 단체를 결성하고 국가 건설 운동을 벌였다. 이후 성주면 치안유지회는 인민위원회로 전환했으며, 벽진면 등지에서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송규선의 주도로 성주군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이 성주에 진주하기 전까지 자치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좌파 계열의 농민조합과 부녀동맹 등 각 분야별 사회 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반면에 우파 진영은 세력이 약해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경과]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한국 문제 결정은 정국을 격랑 속에 빠트렸다. 전국에서 우파 세력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고, 좌파 세력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이 되어 좌우 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경상북도 성주에서는 좌파 세력이 우세하여 좌우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나타나지 않았다. 좌파 세력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신탁 통치 논쟁 이후 전국에서 좌파 세력이 역량을 결집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자, 성주에서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성주군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1946년 3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지지하는 활동을 벌였다.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1946년 5월 휴회에 들어갔다. 이후 미군정은 좌파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좌파 세력을 탄압하였다. 반면에 우파 세력은 기반을 넓혀 나갔으며, 성주에서도 1946년 5월에 대한독립촉성 성주국민회를 결성하였다. 7월에는 중도 좌파 성향의 조선인민당 성주지부가 결성되었다. 이 무렵 성주에서도 좌우 세력이 팽팽히 대립하였다.

이 시기 대중이 피부로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부족이었다. 미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리, 밀 등 하곡 수집에 들어갔다. 하곡 수집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강제적 성격을 띠어 농민들의 불만이 높았고, 경상북도 곳곳에서 군정과 농민들이 충돌하였다. 8월 벽진면에서 군정 관리와 경찰이 출동하여 농민의 집을 수색하고 하곡을 강제로 압수하였다. 농민들은 여기에 맞서 관리를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이 사건으로 30여 명의 농민이 붙잡혀 갔다. 심지어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하곡 수집용 곡식으로 술을 빚어 유흥을 즐기자, 군청 관리들이 규탄 시위를 벌이는 일도 일어났다.

좌파 세력은 미군정이 탄압을 한층 강화하자, 총파업 투쟁으로 맞섰다. 9월 23일부터 시작된 전국 노동자의 파업 중 10월 1일 대구역 광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10월 항쟁이 발발하여 대구 인근을 중심으로 확산하며, 경상북도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성주에서도 10월 3일 오전 3,000명~4,000명의 군중이 성주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파업 돌입, 무기 사용 금지, 무기고 열쇠의 인계, 경찰서 이양을 요구하였다.

경찰이 응하지 않자 시위대는 경찰서를 점거하고, 유치장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이어 경찰을 구타한 후 유치장에 감금하고, 경찰서장 관사를 파괴하였다. 같은 시간에 수륜면, 초전면, 대가면, 가천면, 금수면, 벽진면에서도 시위대가 지서를 공격하였다. 성주의 항쟁은 충청남도에서 파견된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경찰을 구출하면서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성주의 주요 좌파 인사들이 경찰에 붙잡히거나, 일부는 피신했다가 월북하였다. 10월 항쟁으로 좌파 세력에 대한 군정의 탄압이 강화되었고, 좌우 세력 사이에 충돌이 잦아졌다. 좌파 세력은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으며, 성주군에서도 성주군당은 물론 성주면, 초전면, 벽진면, 수륜면 등지에서 면 단위의 당을 결성하였다. 청년들은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을 조직하였다.

1947년 5월 휴회에 들어갔던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좌파 세력은 다시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하며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여 미소공동위원회는 다시 결렬되었다. 미군정은 좌파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성주를 포함한 경상북도에서 500여 명의 좌파 인사가 체포되었다. 좌파 세력의 기반이 약화되는 분위기에서 1947년 11월 우파 세력의 정당인 한국민주당 성주군지부가 결성되었다.

[결과]

1947년 9월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으며, 11월 유엔은 남북한 총선거를 결정하였다. 소련과 북측에서 유엔 총회 결정을 거부하자,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좌파 세력은 유엔 결정을 반대하며 남한 단독 선거의 반대, 미소 양군의 동시 철퇴를 주장하였다. 1948년 2월 성주에서는 단독 선거 반대와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는 군중 100여 명이 가천지서를 공격하여 총을 탈취하고 경찰을 납치하는 일이 일어났다. 3월에는 군중들이 군청과 지서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벌이는 등 단독 선거 실시와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선거를 앞둔 4월에는 청년들이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선거 사무를 담당하는 곳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습격하였다.

좌파 세력의 선거 반대 활동에도 불구하고 5월 10일 제헌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성주에서는 무소속의 이동화와 이호석, 대동청년단 소속의 이낙균 세 명이 출마했으며, 이호석이 당선되었다. 선거가 끝난 후 성주에서는 청년들이 봉화를 올리고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간헐적으로 벌였다. 5월 30일에 개원한 제헌 국회가 헌법을 제정했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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