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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097
한자 大鳳里
영어공식명칭 Daebo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암면 대봉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4년 2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암면 대봉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5.70㎢
가구수 118가구
인구[남/여] 200명[남 109명/여 91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대조동(大鳥洞)과 봉산동(鳳山洞)에서 한 자씩 따와 ‘대봉(大鳳)’이라 이름하였다. 대봉1리의 자연 마을로 새실[조실(租室)·대조동(大租洞)]과 새마[신촌(新村)]가 있고, 대봉2리의 자연 마을로 봉산(封山·鳳山)이 있다.

조실은 성주 읍기(邑基)가 와우형(臥牛形)이라 소는 볏짚이 있어야 움직이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 서남쪽에 솟아 있는 산을 대조산(大租山)이라 하고 행정 구역도 조곡방(租谷坊)이라 하였다고 하며, 마을 이름도 이 산 이름에서 따와 대조동 혹은 조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宣祖) 때 영동에서 입향한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벽룡(朴碧龍)의 후손, 숙종(肅宗) 때 입향한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문달(金文達)과 그 아들 어은(漁隱) 김광선(金光琁)의 후손, 순조(純祖) 때 한성(漢城)에서 입향한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면상(尹勉常)의 후손이 살고 있다.

봉산은 성산 이씨(星山李氏) 집성촌으로 용암면 소재지에서 성주로 이어진 지방도 제905호선을 따라 약 3.5㎞ 지점에서 남서 방향 갈림길의 약 1.9㎞ 지점 신천 변 좌안에 있다. 1400년(태종 즉위년)쯤 태종(太宗)의 태(胎)를 봉안한 봉산(鳳山)[태봉(胎峰)]이 있어 마을 이름을 ‘봉산’이라고 하였는데, 봉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은 아랫봉산마을, 봉산 위쪽에 자리한 마을은 윗봉산마을이라고 부른다.

[형성 및 변천]

통일 신라 이후 조곡방(租谷坊)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군 명칭인 성주군(星州郡)으로 확정하고 방(坊)을 면(面)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대조동, 봉산동, 하진동(下眞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대봉동으로 하고 조곡면과 초곡면(草谷面)을 합한 성암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34년 2월 1일 성암면과 용두면을 합쳐서 용암면으로 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용암면 대봉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대봉리의 남쪽에는 성주군 수륜면, 경상북도 고령군과 경계를 이루며 조선 건국 초 태종의 태를 봉안하여 봉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약 338m의 태봉을 비롯한 약 300m 높이의 산지가 분포하고, 북쪽에는 조실 앞산인 약 136m 높이의 조곡산(租谷山·祖谷山)을 비롯한 약 200m 높이의 산지들이 분포한다. 남북으로 자리 잡은 이들 산지의 중앙을 신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며 흘러 범람원을 형성하고 있다. 이 범람원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배후지 북쪽 산지 말단부에 마을들이 자리한다. 남쪽 산지에는 수륜면 보월리와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태봉재가 있다.

[현황]

대봉리용암면의 서쪽에 자리하여 동부는 용암면 덕평리, 남부와 서부는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와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북부는 용암면상신리, 계상리와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5.70㎢이며, 대봉1리와 대봉2리 2개 행정리에 118가구, 200명[남 109명, 여 9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 성주 옥천서원(玉川書院)[경상북도 기념물]과 봉양재(鳳陽齋), 희명재(希明齋) 등이 있다. 성주 옥천서원은 봉산 위쪽 산기슭 아래에 있는데, 조선 후기 성주목사로 증직[사후에 생전의 관직을 올려 주는 일]된 이사룡(李士龍)[1613~1641]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봉양재는 봉산 서편 산기슭 아래에 있으며, 조선 후기의 유학자인 우헌(愚軒) 이순풍(李順豊)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61년에 지은 재실이다. 희명재는 아랫봉산마을 동편에 있으며, 조선 숙종 때 은일지사(隱逸之士)인 이원석(李元碩)의 학덕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처음 이원석이 만년에 마을 서쪽에 터를 골라 희명정(希明亭)이라 이름하고 소요하면서 덕(德)을 닦던 장소에 후손들이 1770년(영조 46)경 재사를 지어 희명재(希明齋)라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쇠락하자 1995년쯤 현재 장소에 다시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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