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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068
한자 栢田里
영어공식명칭 Baekjeo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재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백전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79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백전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백전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1.37㎢
가구수 794가구
인구[남/여] 2,021명[남 1,023명/여 998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백전리의 동쪽은 인현산(印懸山)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어 오래전부터 읍기(邑基)의 주맥(主脈)으로 신성시하였다. 이 산줄기에 자리한 대금산(大琴山)에 천년 노송이 우거져 있어 사람들이 ‘잣밭골’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백전동(栢田洞)’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잣밭골의 ‘잣’은 ‘성(城)’을 뜻하므로 잣[城]+밖[外]+골[洞]의 결합어인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백전동(栢田洞)으로 잘못 표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백전1리 자연 마을인 목우물[항정촌(項井村)]은 마을 입구에 우물이 있어 마을 앞을 지나는 길손들이 이 우물로 목을 축였다고 하여 ‘목우물[항정]’이라 부르게 되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백전2리 불무골[야동(冶洞)]은 옛날 이곳에 풀뭇간[대장간]이 있어 각종 병장기(兵仗器)와 농기구 등을 만들면서 ‘풀무골[야동]’이라 부르다가 음이 변하여 ‘불무골’로 불린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성주읍 지역은 용산면(龍山面), 남산면(南山面), 본아면(本牙面), 북산면(北山面)의 4개 면으로 구성되었는데 백전리 지역은 본아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백전동으로 하고 4개 면[용산면, 남산면, 본아면, 북산면]을 합한 성주면의 10개 법정동 중 하나로 편제하였다. 1979년 성주면성주읍으로 승격하면서 성주읍 백전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각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성주읍 백전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성주의 진산(鎭山)인 인현산에서 용틀임한 산줄기가 백전리 뒷편인 동북쪽을 감싸면서 대금산에 이르고, 다시 성주읍성(星州邑城)이 있던 봉두산(鳳頭山)[80m]으로 연결된다. 남서쪽으로는 벽진면에서 흘러오는 이천(伊川)이 있는데, 그 사이로 비옥한 사질 양토의 백전들[섬안들]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백전리성주읍 소재지에서 서북쪽에 자리하여 동서남북이 성주읍예산리경산리, 대흥리, 용산리, 금산리와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1.37㎢이며, 백전1리와 백전2리 2개 행정리에 794가구, 2,021명[남 1,023명, 여 9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인현산 줄기와 이천 사이 백전들에는 주로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동남쪽 예산리와 접하는 낮은 언덕에 예산-백전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택지가 조성되고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거주 인구가 늘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 목우물과 경재당(敬梓堂)이 있다. 목우물은 백전1리에 있는 3개의 공동 우물 중 한 곳으로 마을 입구 정미소 뒤편에 있다. 예로부터 물맛이 좋고 마을 입구에 있어 길손들이 목을 축였다고 한다. 경재당은 백전2리 불무골 중앙 가장 위쪽에 있는 재사로, 성산 여씨(星山呂氏) 중시조(中始祖)인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여량유(呂良裕)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여량유가 살았다는 옛터에 후손들이 1965년 건립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후기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곳 여량유의 집에서 군사들에게 밥을 먹였다고 하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탔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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