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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061
한자 大興里
영어공식명칭 Daeheung-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재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3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대흥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79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대흥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5월연표보기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동에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흥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면적 1.98㎢
가구수 196가구
인구[남/여] 393명[남 188명/여 205명]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대흥(大興)’의 정확한 지명 유래는 찾아볼 수 없다. 1914년 본아면의 미이미[하산(荷山)]와 남산면의 개화대, 사동을 성주면 대흥동으로 하고, 본아면에 속하였던 용계촌을 대가면 용흥동으로 이속시키는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새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1리와 대흥2리는 통칭하여 개바대 또는 개화대(開花臺)로 불렀으나, 지금은 대흥1리는 개화대, 대흥2리는 사동(社洞)이라 구분하여 부른다. 개바대, 개화대는 이천(伊川)과 대흥천(大興川)이 합류하는 갯가에 자리한 마을이라 ‘개바대’로 불렀다는 설과 마을 앞에 숲이 울창하고 꽃이 만발하여 ‘개화대’로 이름하였다는 설이 있다. 사동은 마을의 북쪽 야산에 조선 시대 국토[社]와 곡식[稷]의 신에게 제사하던 사직단(社稷壇) 이 있어서 사동이라고 부른다. 대흥3리의 하산 혹은 미이미라고 부르는 마을은, 조선 영조(英祖) 때 백성들의 부역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마을이라 하산이라 불렀다는 설과 권총(權聰)이 마을 앞의 이천과 산수의 경관이 마음에 들어 늘 “하아!”, “하아!” 하고 좋아하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형성 및 변천]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성주읍 지역은 용산면(龍山面), 남산면(南山面), 본아면(本牙面), 북산면(北山面)의 4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지금의 대흥1리와 대흥2리인 개화대와 사동은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와 함께 남산면에 속하였고, 대흥3리인 미이미는 대가면 용흥리와 함께 본아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개화대와 사동, 미이미를 합하여 대흥동으로 하고 4개 면[용산면, 남산면, 본아면, 북산면]을 통합한 성주면의 10개 법정동 중 하나로 편제하였다. 1979년 성주면성주읍으로 승격하면서 성주읍 대흥동이 되었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각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성주읍 대흥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벽진면에서 동류하여 성주읍을 관류하는 이천칠봉산(七峰山)에서 발원한 대흥천이 합류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현황]

대흥리성주읍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2㎞ 벗어난 구릉지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북쪽과 동쪽, 남쪽은 성주읍 용산리백전리, 경산리, 대황리, 서쪽은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용흥리와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1.98㎢이며, 대흥1리와 대흥2리, 대흥3리 3개 행정리에 196가구, 393명[남 188명, 여 20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서쪽으로 2008년 개통한 중부 내륙 고속 도로가 지나가며, 남쪽으로 국도 제33호선이 있어 교통은 양호한 편이다. 남쪽과 동쪽에 지방 하천인 이천과 대흥천이 합류하면서 형성한 넓은 들에서 성주군 지역의 대표 농산물인 참외를 재배하고 있다.

개바대 마을 남서쪽 지역에는 수리 시설인 안터못과 못밑들이 있었으나 중부 내륙 고속 도로가 개설되고 성주 별고을 체육 공원이 이곳에 조성되면서 부지 대부분이 편입되었다. 2016년 개장한 성주 별고을 체육 공원은 공원 내에 실내 체육관을 비롯하여 넓은 운동장과 풋살장, 씨름장, 국궁장 등 다목적 복합 체육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2023년까지 테니스장과 정구장, 볼링장 등의 시설을 추가 건립한 예정이다.

문화 유적으로는 사직단 터, 동제단(洞祭壇) 터, 남산서당 터, 대흥교회 등이 있다. 사직단은 옛날 중국에서 천자(天子)나 제후가 나라를 세우면 곧 중앙과 지방의 읍에 국토와 오곡의 신단(神壇)을 세우고 사직신에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데서 기원한 것으로, 성주의 사직단은 개바대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완만한 언덕 위에 조성되어 있다. 1908년(순종 2)까지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에 병합된 후 퇴폐(頹廢)되고 지금은 개인 묘지와 경작지로 변하였다. 동제단(洞祭壇)은 사동 마을 서쪽에 자리한 마을 수호 제단으로 광복 후까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동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제단 주위를 둘러쌌던 노거수(老巨樹)만 남아 있다. 남산서당은 사동 마을과 미이미 마을의 경계 지점인 언덕에 있었으나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대흥교회는 1901년(고종 38) 성주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고 하나 현재는 정확한 위치조차 확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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