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태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1400
한자 洪泰潤
영어공식명칭 Hong Taeyu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홍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893년 - 홍태윤 영평군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홍태윤 진위군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홍태윤 영평군수 보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2월~1907년 10월 - 홍태윤 양주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10월 - 홍태윤 경기지계위원 임명
추모 시기/일시 1903년 - 홍태윤 선정비 건립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홍태윤 육군참령 겸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7월 - 홍태윤 육군참령에서 해임
몰년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홍태윤 사망
사당|배향지 홍태윤 선정비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55[일패동 466-10]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남성
본관 남양(南陽)
대표 관직 양주군수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에 선정비가 있는 개항기 무신.

[가계]

홍태윤(洪泰潤)[?~1918]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1907년(고종 44)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 조치에 반발하여 순국 자결한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외삼촌으로 박승환에게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편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 근처의 건물 지수당(地水堂) 옆 연못가에는 홍태윤의 선정비를 받치고 있었다는 거북대좌가 있다. 거북대좌의 설명문에는 홍태윤이 을미사변 당시 피살당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교회사 연구자 전택부의 『토박이 신앙산맥』에서는 홍태윤을 백장 출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홍태윤의 출신 및 가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하게 비정하기가 어렵다.

[활동 사항]

홍태윤은 전택부의 『토박이 신앙산맥』에서 “본래 백장 출신이지만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해서 일약 양주목사가 된 사람이다.”라고 서술한 대목과 같이 일반적으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를 궁에서 탈출시킨 공을 인정받아 곧장 지방관으로 영전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 민씨의 임오군란 당시 탈출 및 호위에 기여하였다는 이유로 고종~순종 시기 여러 차례 포상을 받은 민형식(閔炯植)·김중현(金中鉉)·현흥택(玄興澤) 등과 홍태윤이 비슷한 사유로 같은 시점에 서훈된 기록이 확인됨을 감안하면 임오군란 당시 홍태윤이 실제로 명성황후 민씨의 피란을 도운 공로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나, 사료상에서 홍태윤이 첫 외직인 포천현감에 제수된 시점은 1892년으로 임오군란 시점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료상에서 홍태윤의 활동이 처음 확인되는 시점은 1885년으로, 이때부터 포천현감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친군우영(親軍右營) 초관(哨官)·통위영(統衛營) 초관·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대관(隊官) 등 궁궐을 호위하는 직책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893년 영평군수에 제수되었고, 1895년 진위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896년 다시 영평군수에 보임되었다.

이 무렵의 홍태윤에 대하여 전택부는 『토박이 신앙산맥』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고종은 3년간이나 황후의 슬픈 영혼을 곁에 품고 계시다가 1897년에야 그 시체를 홍릉(洪陵)으로 모시게 되었다. 홍태윤은 그것이 보기에 너무 딱하여 기독교 신자 백장들을 휘동(麾動)하여 동대문에서 홍릉에 이르는 20리 길에다 버드나무를 심었다. 이는 초하루 보름으로 홍릉으로 거둥하시는 부왕[고종]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라고 서술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1934년 출간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에서는 1897년 명성황후 민씨의 국장과 관련하여 “이때 현 혜화동의 주민인 홍태윤이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도로의 양쪽에 백양수(白楊樹)를 가로수로 심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의 1907년 11월 28일 자 기록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해당하는 송동(宋洞)의 ‘노대감(老大監)’에게 발송된 밀서를 언급하면서 수신자가 양주군수 홍태윤의 아버지라고 명시하고 있는 점, 그리고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의 일기 자료인 『하재일기(荷齋日記)』에 1909년 7월 26일 송동의 홍태윤을 방문하였으나 성묘하러 교외로 나간 상태라 만나지 못하고 명함만 남기고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경성부사』에 기록된 ‘홍태윤’은 전택부가 서술한 ‘홍태윤’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이후 홍태윤은 1902년 2월 양주군수에 제수되었고, 1902년 10월 토지조사와 토지 매매 관련 증서 발급 등의 업무를 전담하는 지계아문(地契衙門) 소속 경기지계위원(京畿地契委員)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여기에 1904년 육군참령(陸軍參領) 직책까지 겸임하게 되었으나, 고종의 강제 퇴위 직후인 1907년(순종 즉위) 7월 육군참령에서 해임되었고 1907년 10월 양주군수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1918년 사망하였는데, 홍태윤의 상장례에 순종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가 300원을 내려 부조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에 있는 양정동 행정복지센터[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55] 입구에 홍태윤의 양주군수 재임 당시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3년에 조성한 선정비가 있다. 홍태윤을 기리는 선정비는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 남아 있다.

경기도 양주시 전역에 산재해 있던 송덕비 17기를 모아 놓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양주관아지(楊州官衙址)의 양주목사 송덕비군(頌德碑群) 중에도 홍태윤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전면에는 ‘행군수홍공태윤리읍휼민영세불망비(行郡守洪公泰潤釐邑恤民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광무 8년 10월에 비석을 세웠음을 기록하였는데, 광무 8년은 1904년이므로 홍태윤이 아직 양주군수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에 2017년 ‘양주목사 선정비’라는 명칭을 부여받아 도봉구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4기의 선정비 중에도 홍태윤의 선정비가 있다. 홍태윤의 선정비는 상단부 일부가 훼손되어 전면부의 ‘홍공태윤애민선정비(洪公泰潤愛民善政碑)’라는 문구 윗부분 글자들은 일부만 남아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과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소재 비석들의 문구를 감안하면 부분적으로 확인 가능한 ‘군수(郡守)’라는 두 글자 위에 ‘행(行)’이라는 글자까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후면에는 계묘년(癸卯年) 3월에 비석을 세웠음을 새겨 놓았는데, 계묘년은 1903년이니 이 역시 홍태윤이 아직 양주군수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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