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레이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870
영어공식명칭 Wonjin Rayon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방성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66년연표보기 - 흥한화학섬유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72년연표보기 - 흥한화학섬유공장에서 세진레이온으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76년연표보기 - 세진레이온에서 원진레이온으로 개칭
해체 시기/일시 1993년 7월 10일연표보기 - 원진레이온 폐업
최초 설립지 흥한화학섬유 -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 지도보기
성격 기업
설립자 박흥식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에 있었던 비스코스 인견사 생산업체.

[개설]

원진레이온은 1966년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 1번지[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에 설립되어 비스코스 인견사[레이온사]를 생산했던 업체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스코스 인견사 생산업체였으나, 안전 설비 결여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견사를 생산하는 동안 유출된 이황화탄소[신경독의 원료로 쓰이는 유해물질]와 황화수소 가스에 중독되는 산업재해가 발생해 1993년 7월 10일 문을 닫았다.

원진레이온의 산재 사건은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자, 세계 최대의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으로, 피해자는 약 1,000명에 이른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직업병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변천]

원진레이온은 1959년 흥한화학섬유로 시작하여, 1962년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동에 공장을 짓고, 1966년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에서 사용했던 방사 기계를 들여오면서 비스코스 인견사[인조비단실, 즉 레이온]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후 1968년 부도를 맞았다.

1972년 흥한화학섬유에서 세진레이온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노후된 일본산 방사기계를 더 들여와 인견사의 생산량을 대폭 늘렸다. 그러나 기계의 노후화로 인한 제품 불량 등의 이유로 세진레이온은 경쟁력을 잃었고, 인조견면을 만들 때 사용하는 원료 용액이 유출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세진레이온은 이후 1976년 사명을 ‘원진레이온’으로 변경하여 운영되었으나 적자는 해결되지 못하였고, 1979년 다시 부도를 맞았다.

1982년 원진레이온은 적자의 주요인이었던 인조견면 공장을 폐쇄하고 1,30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였다.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로 남아 있었던 노동자들은 4조 3교대에서 3조 2교대로 하루에 12시간을 근무해야 했다.

늘어난 노동시간만큼 유독성 가스인 이황화탄소에 노출된 노동자들은 건강 악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4명의 노동자가 숨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계속 적자에 시달리던 원진레이온은 1993년에 폐업, 폐쇄 그리고 파산 선언을 하면서 문을 닫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원진레이온은 이황화탄소[CS₂]를 사용하여 비스코스 인견사를 제조하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하였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

이황화탄소는 빨갛게 달군 탄소에 황의 증기를 쐬어 얻는 무색의 액체이며, 불순할 때에는 악취가 나며 노란색을 띤다. 인체에 해로운 독성을 지닌 가스로 다량의 이황화탄소에 노출되면 신경쇠약 상태부터 의식 장애, 히스테리 등 다양한 신경 증상과, 뇌경색, 다발성 신경염, 협심증, 신부전증 등을 일으킨다. 만성중독이 되면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며 말을 못하는 등 중풍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이러한 중독 증상은 치료가 어려워 장기적인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원진레이온에 산업재해 환자는 소수이지만 꾸준히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1,300여 명의 노동자를 해고한 이후 산업재해 환자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이는 노동자 대량 해고로 남아 있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하루 8~12시간이었고, 그만큼 많은 이황화탄소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원진레이온 방사과에 근무하는 노동자 4명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1988년 『한겨레』 신문을 통해 고발되면서 원진레이온의 산업재해가 국내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자 및 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원진레이온의 노동자들은 원진레이온[산업은행 법정관리 상태]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결국 원진레이온은 폐쇄되었으나 산업재해 환자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산업재해에 대한 피해 보상과, 공장 폐쇄에 따른 보상 대책을 위하여 1993년 ‘원진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후 1997년 5차에 걸친 교섭이 진행되어 합의가 이루어져 투쟁은 일단락되었다.

[현황]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투쟁의 결과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이 세워졌으며,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의 원진종합센터 소속으로 1999년 원진녹색병원[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003년 재단부설녹색병원[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설립하여 산재 직업병 환자, 인권 침해 피해자 등을 돌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원진레이온 산업재해는 단순히 제조업체의 흥망을 넘어 한국 현대사회의 명암을 그대로 반영한 사건이다. 이러한 산업재해와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 사회가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직업병 문제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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