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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96
한자 近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정자

[정의]

일제강점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라북도 남원시의 역사.

[개설]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는 남원의 역사는 민족사의 고난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은 전라도의 남원과 구례, 경상도의 성주와 진주 등인데, 논에 볍씨 한 말을 심어서 최상은 140두를 수확한다.”라는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은 남원이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라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남원 역시 일찍부터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탈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3.1운동을 비롯하여 남원 청년동맹, 신간회, 형평사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항일운동단체에 의한 항일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1945년의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아울러 가져다주었다. 남원지역 역시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사실은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행정구역 개편]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부로 남원부가 폐지되고 남원군과 남원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운봉군의 4개면(산내면, 아영면, 동면, 운봉면)을 남원군으로 편입시켰고, 당시까지 남원군에 속하였던 지사면을 임실군으로, 동계면을 순창군으로, 번암면을 장수군으로, 고달면을 곡성군으로, 산동면을 구례군으로 각각 편입시켰다. 1931년 10월 1일부로 남원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35년 3월 1일부로 남원읍에 속하던 금성리대산면으로, 주천면에 속하던 노암리를 읍으로 편입시켰다.

또 1958년 7월 8일부로 왕치면을 없애는 대신 읍에 편입시킴으로써 1읍 16개면으로 구획되었다. 읍 승격 이후 행정구역의 변화가 없다가, 1981년 시로 승격되었고 남원군과 분리되어 별도의 행정구역을 이루었다. 1985년 7월 대강면 수홍출장소를 폐지, 1990년 4월 송동면 양평리 일부가 금지면 상신리에 편입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에 따라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남원시가 되었으며, 같은 해 3월에 운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5월 1일에는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되었고 1998년 쌍교동죽항동금동으로, 용정동향교동으로 각각 편입되어 현재 1읍 15면 7동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남원지역은 일찍부터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침탈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3.1운동을 비롯하여 대동단, 신간회, 형평사, 남원청년동맹 등 항일운동단체에 의한 항일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전라북도에서는 1919년 3월 3일부터 4월 13일까지 약 40일 간 전도에 걸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박은식 통계에 의하면 집회횟수 130회, 참가인원수 19만 300명, 사망자 108명, 부상자 417명, 피체포자 870명으로 집계되었다. 남원에서는 4월 3일 덕과면 면장 이석기(李奭器)가 주동이 되어 식수일을 기념한다고 면민 800명을 모이게 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를 계기로 이튿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는 기독교도와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장터에서 1,000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시작하자 장군과 읍민들이 합세하여 수천 명의 군중이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일제 헌병대가 발포하여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1920년에 결성된 대동단 남원지부는 서울 본부와의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남원지부의 활동목표를 설정하였는데, 항일운동에 동조하는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중앙본부를 통 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 헌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동단은 전국적인 독립단체였고 의친왕까지 가담되어 있어 일본 경찰의 예리한 감시 추적을 받았다. 결국 1922년 9월, 대동단 전라북도 지부의 임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26년 7월 28일에는 남원에 형평사가 창설되어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서는 등 자유평등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그 후 1927년 2월 12일에는 대동단 남원지부, 형평사 남원분사 등 민중운동단체들과 남원 지역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남원에 독립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어 『조선일보』 등 지방신문기자들도 적극 참여하는 지식층의 주도로 농촌 계몽운동과 식민정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8월 12일 전라북도 남원 지역의 5~6개 면 단위 청년회가 결속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기 위해 남원청년동맹으로 통합·결성하여 봉건사상 퇴치와 정치·경제적 각성, 민중의 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주목되는 사건으로 1945년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금융조합에 근무하던 박주영 등이 금서 교환과 유인물 배포, 징병 기피 등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5월 13일 체포 구금된 5·13투옥사건을 들 수 있다. 5·13투옥사건은 일제하에서 공무원, 교사, 금융업 종사자 등 소위 지식인층의 신분으로 항일활동을 수행하였다는 데 순수한 민족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남원 지역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저항과 독립을 위한 투쟁은 멈출 줄 몰랐다. 3·1만세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현대]

1945년의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아울러 가져다주었다. 남원지역 역시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사실은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1950년 6·25 때 7월 24일 공산군에게 점령당했다가 9월 28일 유엔군의 진주로 다시 수복되었다. 이 때 각급 관청과 학교·교회·주택 등이 불탔으며, 9·28 수복 후에는 패주하던 공산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근 주민을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컸다. 그때 애국청년·학생들이 경찰을 도와 공비 토벌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시련의 역사 속에서 남원은 동편제 판소리와 『춘향전』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등 어느 지역보다 탁월한 문화역량을 발전시켜왔다. 최근에는 다양한 관광지와 축제, 테마·체험관광의 개발을 통해 관광 도시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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