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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93
한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유호석최윤진

[정의]

고려시대에 전라북도 남원 일대에 설치되었던 교통 및 통신 제도.

[변천]

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역부와 역마를 이용하여 관물의 수송, 공문서의 전달, 오고 가는 관리들의 숙박에 활용되었다. 고려 성종대에 와서 더욱 구체화된 역참제는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驛)으로 구성되었다. 각 역에는 말과 역장(驛長), 역정(驛丁)을 두었다. 이 시기에 전라도에는 전공주도(全公州道) 21개 역, 승라주도(昇羅州道) 30개 역, 산남도(山南道) 28개 역, 남원도(南原道) 12개 역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모든 역승(驛丞)이 찰방으로 승격되고 40도 546역으로 개편되었다. 전라도의 역은 삼례도(參禮道)·제원도(濟原道)·오수도(獒樹道)·청암도(靑巖道)·경양도(景陽道)·벽사도(碧沙道)로 나뉘어 관리되었다.

이 중 남원 지방을 관할하던 오수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던 오수역·창활역(昌活驛)·동도역(東道驛)·인월역(引月驛)·지신역(知申驛)·낙수역(洛水驛)·응령역(應嶺驛)과 새로이 설치된 구례군 구례면 신월리 잔수진의 잔수역(潺水驛), 여천시 소라면 덕양리 현 덕양촌의 덕양역(德陽驛), 광양군 진상면 섬거리의 섬거역(蟾居驛), 순천시 덕월면 양율리의 양율역(良栗譯), 광양군 광양면 익신리의 익신역(益申驛) 등 12개 역을 관할하였다.

조선시대의 모든 역에는 찰방이 있어 역체(驛遞)의 업무를 맡아 보면서 역장의 일도 겸하게 되어 있어 교통과 통신 업무를 같이 관할하였다. 찰방은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역에는 역마와 역졸이 있어 언제나 급한 관용·공용 업무에 대비하였다. 또 역의 관사들이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토지를 주었는데, 이를 역둔토(驛屯土)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 서울에 우정총국이 창설되어 현대화된 통신 우편 제도를 실시하게 되면서 역 제도는 없어졌다.

[남원도 관할의 12개 역]

1) 은영역(銀嶺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에 설치되었던 역참(驛站)으로 남원부의 동쪽 2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일명 응령역(應嶺驛)이라고도 하였다. 남원부에서 운봉(雲峰)으로 통하는 역로로 여원치(女院峙) 밑에 있었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2) 창활역(昌活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남원시 금지면 창산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창활수(昌活藪) 남쪽에 있었다. 조선 건국 이래 역승(驛丞)이 있는 본역(本驛)이었으나 조선 세조대에 와서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남원부에서 곡성으로 가는 중간역이다.

3) 통도역(通道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남원시 도통동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남원부의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었다. 『용성지(龍城誌)』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백공산(百工山) 아래에 있었으나 숙종 무렵 역졸(驛卒)들이 달아난 뒤 옛 역 터를 버리고 황죽(黃竹)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대에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운봉과 번암(磻岩)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4) 오원역(烏原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오원 강변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임실현의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삼례도찰방(蔘禮道察訪)의 관할 하에 들어갔는데, 역리(驛吏) 55명, 역마(驛馬) 35필에 이를 만큼 대규모의 역참이었다. 다른 역보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역과 원을 겸한 듯하다. 전주에서 임실과 남원으로 가는 길목이다.

5) 잔수역(潺燧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구례현 서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곳에는 잔수진(潺水津)이 함께 있어서 역의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전라남도 순천에 이르는 역로이자 잔수진을 건너 하동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6) 오수역(獒樹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시장터에 있던 역참으로 남원부 북쪽 40리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찰방이 머무르는 중심 역이었다.

7) 인월역(引月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 시장터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운봉현의 동쪽 16리 되는 곳에 있었다. 남원부에서 운봉(雲峰)을 거쳐 함양에 이르는 중간 역로에 있었다. 고려말 우왕 때 함양과 운봉현을 침입해 들어와 노략질을 하다가 이곳에 주둔하였던 왜구들을 이성계황산 전투에서 토벌하여 이름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8) 갈담역(葛潭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임실현의 서쪽 40리에 있었다. 전주에서 광주에 이르는 길목으로 임실과 순창 사이에 위치한 역이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삼례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역리(驛吏) 8명, 역노(驛奴) 9명, 역보(驛保) 14명, 역마(驛馬) 5필이 있었다.

9) 대부역(大富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남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옥과현(玉果縣) 동쪽 6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라북도 순창에서 전라남도 옥과에 이르는 길목에 있으며, 이 역으로부터 전라남도 석곡을 거쳐 순천에 이르고 또한 광주와 나주로도 통하는 역이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경양도승(景陽道丞)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10) 지신역(知申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남 곡성군 곡성읍 신월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곡성군 남쪽 6리 되는 곳에 있었다. 남원-곡성-광주 길과 주암-순천 길로 통한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지금도 역 터가 남아 있어서 역골 또는 역촌이라고 불린다.

11) 고양역(高陽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군 신전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순천부(順天府) 북쪽 60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왜적의 침입으로 조선 세종 때에 이미 폐지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조선 초에는 이곳에 고양원(高陽院)도 설치되어 있었다.

12) 낙수역(樂水驛)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남 순천시 승주군 송광면 낙수리에 설치되었던 역참으로 순천부 서쪽 73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원에서 곡성, 석곡, 주암, 낙수역을 거쳐 전라남도 벌교에 이르는 역로에 있었다. 조선 세조대에 와서는 오수도찰방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남원도와 국도]

이 12개 역은 남원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오늘날의 국도 17호선, 국도 24호선, 국도 22호선 도로망을 따라 설치되었다. 남원도 관할의 12개 역과 현재 3개의 국도를 연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공주도(全公州道)의 마지막 역인 삼례역으로부터 전주를 거쳐 남원도의 첫 역인 오원역을 위시하여 오수역과 대산면 운교참을 경유하여 금지면 창활역, 전라남도 곡성군의 찬수역을 거쳐 순천에 이르는 노선은 현재의 국도 17호선과 일치하고 있다.

둘째, 남원부에서 동쪽으로 통도역을 거쳐 이백면 효기리에 있는 은영역을 경유하여 인월역에 이르는 노선은 현재의 국도 24호선과 일치하고 있다. 셋째, 임실군 강진면 갈담역에서 출발하여 순창과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 소재한 대부역을 거쳐 승주군 주암을 거쳐 낙수역과 고양역에 이르는 길은 현재의 국도 22호선과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남원부가 관장하고 있던 남원도가 현재의 국도 3개 노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일찍부터 남원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정치적·군사적 및 경제적·전략적 요해지로서 삼남에서 손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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