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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63
한자 南原-豪放-南道-東便制-聖地
영어음역 Dongpyeonje Pansoriwa Gugagui Seongji
영어의미역 Home of Dongpyeonje Pansori and Gugak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동현

[개설]

남원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다른 전통 음악, 예컨대 좌도 농악이나 가야금·거문고·대금 등에서도 훌륭한 전통을 이어온 곳이지만, 남원이 국악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것은 단연 판소리 때문이다. 남원의 판소리 전통은 너무 깊고 넓어서 다른 지역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판소리는 남원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 많은데, 특히 「춘향가」에는 남원 지역의 많은 설화들이 스며들어 있다. 남원에서 배출된 수많은 명창들은 판소리사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엇보다 남원 사람들이 일찍부터 판소리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남원은 국악의 성지라 일컬어질 만하다.

[문화 경계로서의 지역 범위]

여기서 먼저 남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의 범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남원의 판소리를 말한다고 할 때의 남원은 행정 구역 상의 명칭이 아니라, 문화의 경계로서의 명칭일 것이며, 행정 구역과 문화의 경계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행정 구역으로서의 남원도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의 담양, 순창, 구례, 곡성, 광양, 순천, 임실, 무주, 장수, 진안 등이 한때는 모두 남원에 속했던 지역이다. 따라서 현재의 행정 구역을 고집해서 그 경계를 설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판소리를 논의할 때의 남원이라는 명칭은 판소리 문화의 한 경계로서의 ‘남원’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남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생하고, 그 일원에 전승 발전된 판소리와 특성을 공유하는 지역으로 개념을 넓힐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지역이 구례와 곡성이다. 구례와 곡성은 현재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남원과는 먼 지역으로 알기 쉽지만, 판소리의 전승·발전 과정상에서 본다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남원이 국악의 성지인 이유]

남원과 판소리의 관련은 우선 남원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 판소리가 많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주지하다시피 판소리를 대표하는 「춘향가」는 남원이 그 배경이다. 「흥보가」 또한 “운봉 함양 두 얼품”에 흥보가 살고 있다고 했다. 「변강쇠가」의 변강쇠는 “둥구 마천 가는 길”에 서 있는 장승을 패 때고 동티가 나서 죽는다. 마천은 함양 땅이지만 「변강쇠가」의 배경이 지리산으로 되어 있으므로, 남원권이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남원이 판소리의 성지라는 세간의 평을 받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춘향가」이다. 「춘향가」는 판소리로나 고전 소설로나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가장 많은 소리꾼들이 「춘향가」를 불렀으며, 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였다. 또 문헌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춘향가」는 남원을 배경으로 하여 남원에 실재하는 여러 곳이 등장한다.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춘향가」가 남원이 판소리의 성지라는 인식을 낳는 데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흥보가」는 남원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그 속에 배경이 되는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간 묘사를 통해 장소를 특정화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남원에 「춘향가」의 근원이 된 설화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판소리 「춘향가」 근원 설화 중에서 남원을 배경으로 한 설화들로는 성이성(成以性) 설화, 춘양(春陽) 설화, 「박색터 설화」가 있다. 이외에도 남원에는 비슷한 설화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화들이 꼭 「춘향전」 생성 이전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춘향전」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 춘향을 주인공으로 한 설화들이 창작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서야담』에 실려 있는 노진(盧稹) 설화「춘향전」의 발생과 관련하여 거론된다. 노진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하였다. 마침 당숙이 선천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혼수 비용을 얻을까 하였으나 냉대만을 당하였다. 여기서 한 동기(童妓)를 만나 결연을 맺었고, 4~5년 뒤 과거에 급제한 후 절에 있던 그 동기를 만나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호를 옥계(玉溪)라고 하며, 도승지·대사헌·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578년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노진 설화는 가난한 양반과 기녀의 결연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춘향전」의 근원 설화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으나, 노진이 남원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남원 사람 양주익(梁周翊)「춘몽연(春夢緣)」을 썼다. 무극재(無極齋) 양주익은 1722년(경종 2) 남원 이언방(伊彦坊)[현재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서 출생하여 1802년 81세로 생을 마감한 문장가이다. 그가 필사본으로 남긴 문집 『무극집(無極集)』의 「무극선생행록(無極先生行錄)」에 35세 때에 ‘저춘몽연(著春夢緣)’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춘향전」의 고본으로 추측된다.

원래 양주익의 집안은 부자였는데, 양주익의 5대조인 양대박(梁大樸)이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와 싸우면서 재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양주익이 과거에 급제한 1754년에는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잔치를 하고도 막상 기생들에게 줄 돈이 없어서 대신 「춘몽연」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춘몽연」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남원이 판소리의 고장이라는 것은 남원에서 많은 명창이 배출되었고, 또 그 명창들이 판소리사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남원에 판소리 관련 설화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거나, 남원을 배경으로 한 판소리들이 있다고 해서 남원이 판소리의 중심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이 존재해야 하고 또 그들의 업적이 뛰어나야 하는 것이다. 뛰어난 판소리 명창의 존재야말로 남원이 판소리의 고장이라는 평가의 실질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송흥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원 판소리의 줄기찬 전통은 남원을 판소리의 고장으로 평가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민들이 이런 전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남원 사람들은 일찍부터 판소리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1931년부터 시작된 춘향제를 계속 이어오고 있는 것이나, 남원국악원을 설립하여 판소리를 지켜온 노력, 그리고 국립민속국악원을 유치한 것 등이 바로 남원 사람들의 판소리 사랑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기에 남원이 판소리의 중심지로서 국악의 성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남원의 판소리 명창들]

판소리사에서 초기의 소리꾼으로 알려진 사람은 하한담(河漢譚)·최선달(崔先達)·우춘대 등이다. 하한담과 최선달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노 광대 전도성의 구술에 의하면, 전이 자기 연소시대에 명창 박만순·이날치 등이 (중략) 역대 명창을 순서로 호명할 때에 제일 먼저 하·최 양씨를 제일 먼저 드는 것을 누차 들은 기억이 있다”고 증언한 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하한담은 「갑신완문」(1823)에 나오는 하은담(河殷譚)과 같은 사람으로 보이며, 최선달은 충청도 결성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바가 없다. 우춘대는 신위의 「관극시」(1826)에 이름이 등장한다.

권삼득(權三得)[1771~1841]은 본래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사람이지만, 남원 주천방 노씨의 외손으로 어려서부터 주천방에 와서 판소리를 대성하였다고 한다. 권삼득은 판소리사에서 더늠을 남긴 최초의 소리꾼이다. 그의 더늠은 「흥보가」 중에서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이다. 지금도 소리꾼들은 이 대목을 부를 때면, “옛날 우리나라 팔명창 선생님이 계실 시절으, 팔명창 선생님 중 권삼득 선생님의 더늠인디”와 같이 이 대목이 권삼득의 더늠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 많다.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은 ‘덜렁제’라고 하는 특별한 선율 구조로 되어 있다. ‘덜렁제’는 높은 음역의 la 음을 길게 동음 지속하여 권마성처럼 길게 외치는 것이 fanfare와 같은 느낌을 주며, 높은 음 la에서 낮은 음 La로 넓게 뛰어내려 la-La 혹은 la-sol-re-La와 같은 도약 선율이 많아서 매우 씩씩한 느낌을 준다.

이 선율은 「홍보가」의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 외에도 「적벽가」의 ‘위국자의 노래’, 「춘향가」의 ‘군뢰사령이 춘향을 잡으러가는 대목’, 「심청가」의 ‘남경 장사 선인들이 사람을 사겠다고 외치는 대목’ 등에 쓰인다. 이에 대해 유기룡은 “덜렁제는 곡풍이 울툭불툭하는 성깔이 있어서 나약한 그때의 판소리 경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준 것”이라고 하였다.

권삼득 이후 남원에서는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대표할 만한 소리꾼을 배출하였다. 가왕(歌王)으로 일컬어지는 송흥록과 그의 동생 송광록이 바로 그들이다. 송흥록남원 운봉 비전리에서 태어났다. 송흥록의 판소리사에서의 공헌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진양조의 완성이다. 진양조의 개발에 관해서는 그의 매부였던 명창 김성옥과의 일화가 전해진다. 김성옥은 충청남도 강경 사람으로 당시 대명창이었으나, 학슬풍(일종의 무릎 관절염)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요절하였다. 김성옥이 학슬풍으로 누워 지내는 동안 진양조를 개발하였고, 송흥록은 오래 연마하여 진양조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진양조는 판소리 장단 중 가장 느린 대목들에 많이 쓰인다. 따라서 아주 슬픈 대목에 많다. 또한 양반 음악인 정악의 특성을 간직한 곳도 많다.

둘째로, 산유화조(메나리조)의 개발을 들 수 있다. 산유화조는 경상도 민요의 선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송흥록이 산유화조를 개발했다는 것은, 판소리 속에 경상도 민요의 선율을 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송흥록은 진양조의 완성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하고 산유화조의 개발을 통해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함으로써, 판소리가 계급적·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송흥록을 ‘가왕’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러한 데 있을 것이다. 송흥록의 소리는 남원·구례·순창·고창 등으로 펴져가며, 동편제 소리라는 큰 가닥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송흥록은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추앙을 받는다.

송흥록의 동생 송광록은 오래 동안 형인 송흥록의 고수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고수에 대한 하대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로 들어가 오랜 수련 끝에 대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송광록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 ‘긴 사랑가’가 있다. ‘긴 사랑가’는 “만첩청산 늙은 범이”로 시작하는 ‘사랑가’로서, 지금도 모든 판소리 「춘향가」에 남아 있다.

송광록의 아들은 송우룡이다. 송광록 대에 이미 구례로 이사했기 때문에 송우룡은 구례에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송우룡은 송씨 가문 소리의 전통을 잘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의 아들 송만갑이 새로운 소리를 하자 패려 자손이라고 하여 독살하려고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전통을 얼마나 소중히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송우룡「수궁가」를 잘 했으며, 그의 더늠은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현재 부르고 있는 것보다는 길이가 매우 짧고, 또 장단도 중모리가 아니고 진양조로 되어 있어 전승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송우룡은 아들 송만갑[1865~1939], 유성준[1874~1949], 이선유[1872~?] 등을 제자로 두었다.

장재백[?~1907]은 『조선창극사』에 장자백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과 전라감영의 문서에 장재백으로 나오므로 장재백으로 불러야 한다. 또 『조선창극사』에는 전라북도 순창 출신이며 김세종의 제자라고 하나, 호적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 10통 10호까지만 확인된다. 장재백의 부모가 순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순창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장재백은 1885년 전라감영의 잔치에 김세종과 함께 참여하여 오십 냥을 받았다는 기록이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라는 전라감영의 문서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크게 이름을 떨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1887년 무과 병과에 2,593인으로 급제한 장재백의 교지가 전한다. 장재백「춘향가」를 잘했으며, 더늠으로 「춘향가」 중 ‘적성가’가 전한다. 장재백의 묘는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에 있다.

송만갑송우룡의 아들로서 근세 오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자기 가문의 소리 전통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소리 세계를 개척하여 새로운 소리를 개발하였다. 특히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리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원지』에는 송만갑이 일곱 살에 판소리에 입문하고, 아홉 살 때 아버지인 송우룡을 따라 구례군 용방면으로 이사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다른 문헌에는 모두 구례 출신으로 되어 있다. 송만갑 자신은 자서전에서 전라남도 순천군 낙안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1895년(고종 32)까지는 구례군의 일부가 남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송만갑은 어디까지나 남원 소리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소리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리의 전통이 남원 운봉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들 역시 남원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송만갑은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은 장판개(1884~1937, 순창), 김정문(1887~1935, 남원), 박봉래(1900~1933, 구례) 등이다.

유성준도 『남원지』에는 남원군 수지면 출신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기록에는 구례 출신으로 되어 있다. 유성준은 구례뿐만 아니라 하동 등지에서도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송만갑과 마찬가지로 유성준도 남원 판소리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소리꾼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성준「수궁가」「적벽가」를 잘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임방울·김연수·정광수 등이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이들은 동편제 판소리 중에서도 「수궁가」「적벽가」의 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화중선의 본명은 이봉학(李鳳鶴)이며, 1988년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현재의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 장좌리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열세 살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남원권번에 기적을 두고 판소리를 배웠다. 당시 수지면 박씨 문중의 박해창이 머리를 올려주어 이것을 인연으로 박씨 문중으로 찾아갔으나 쫓겨났다.

이 무렵 소리에 전념할 것을 결심했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수지면 장국리에 살던 장득진이다. 15세 때 장득진의 첩으로 출가하여 남원을 오가며 소리를 하다가, 17세 되던 해에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위해 장득진의 고향인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하여 약 5년간 소리 공부를 하였다.

23세 경 상경하여 활동을 시작한 이화중선은 26세 때인 1924년 조선물산장려회 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심청가」 중 ‘「추월만정」’을 불러 당시 최고 명창으로 대접받던 배설향을 압도하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화중선 또한 남원 출신은 아니지만, 남원 판소리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화중선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여자 소리꾼이었다. 그녀가 부른 ‘「추월만정」’(「심청가」 중에서 황후가 된 심청이 부친을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대목)이나, 동생인 이중선과 함께 부른 남도 민요인 「육자배기」는 그야말로 공전의 대히트를 하여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중심이 된 협률사(음악 공연 단체)는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어 이화중선이 고을 돈을 모두 쓸어 가 버린다고 할 정도였다. 이화중선의 이름이 1960년대의 서정주의 시구에도 등장하고, 우리 민요 속에도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 놀고요, 명기명창 화중선이는 장고 바람에 논다’는 구절이 있으며, 무슨 일이 잘 돼 신이 날 때 ‘화중선이가 삐종 물고 나왔다’고 말할 정도면 짐작이 갈 것이다.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은 호적에 의하면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출신이다. 그러나 남원군 주천면 주천리로 이사하여 남원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유성준의 생질로서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가르치는 대로 따라서 하지 못한다고 얻어맞은 후에 유성준의 문하를 떠나 송만갑의 수행 고수를 하다가 명창이 되었다.

후에 다시 서편제 소리꾼 김채만에게 배워 동편제 판소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문은 또 남원권번의 소리 선생을 오래 하면서 박초월[1913~1987], 박녹주[1906~1981], 김영운[1917~1975], 강도근[1917~1996]과 같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김영운김정문의 형 김정식의 아들로 호적명은 김기순이다. 뒤늦게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김정문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김정문은 크게 이름을 떨친 소리꾼은 아니었으나, 남원과 운봉에서는 상당히 이름 있는 소리꾼으로 행세했다. 김영운김정문 사후에 남원국악원의 소리 선생을 했는데, 명창 안숙선도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김영운강도근과 처남 매부 간이다. 김영운김정문으로부터 배운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다. 목은 좋지 못하여 방안 소리에 적합한 소리꾼이었다. 김영운김정문 사후 강도근 등장 이전까지의 공백기에 남원국악원에서 남원 판소리를 지켰다.

김정문의 제자로서 남원 판소리를 이어온 가장 대표적이 사람이 강도근이다. 강도근은 남원읍 향교리 출신으로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후에 송만갑에게 미진한 부분을 배웠다. 유성준에게는 「수궁가」를 배웠다. 그러나 강도근이 이름을 얻은 것은 「흥보가」 때문이었다.

강도근은 1953년 이래 별세하기까지 남원에 머물며 남원의 판소리 전통을 지켰다. 그는 “나는 자작(自作)은 안 한다.”고 공언하면서 스승에게 물려받은 판소리 전통을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88년 「흥보가」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강도근은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안숙선·전인삼·이난초 등의 제자를 두었다.

박초월은 전라남도 승주군 출생인데, 어려서 남원 운봉 비전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송만갑·김정문·유성준·오수암 등에게 배워 해방 전후로부터 별세하기까지 박녹주·김소희와 함께 판소리 여창의 트로이카의 한 사람으로 군림하였다.

박초월은 서슬 깃든 고음과 애원성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박초월의 소리는 특히 서민적 애환을 표현하는데 뛰어났으며, 이로 인해 호남 지역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애호를 받았다. 박초월의 소리는 최난수·조통달·김수연 등에게 전승되었다.

남원은 송흥록으로부터 강도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많은 명창들을 배출하여, 판소리사의 중요 고비마다 새로운 소리를 개척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안숙선·강정숙·전인삼 등의 명창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판소리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남원의 소리 전통을 한 마디로 말하면 ‘동편제 판소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동편제 판소리는 남원에만 전승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편제 판소리를 대표할 만한 소리꾼들이 남원 출신이었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못한다. 또 동편제 판소리를 가장 잘 지켜온 지역이기도 한 것이다.

[기교가 아닌 소리에 모든 것을 건 예술 정신]

동편제 판소리의 창법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발성, 장단의 운용, 시김새, 템포, 너름새 등 판소리의 거의 모든 측면들을 포괄하고 있다. 발성 면에서는 통성을 주로 사용하여 ‘목으로 우기는’ 창법을 구사하는 ‘막 자치기 소리’라고 한다. 통성은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를 가리킨다.

‘막 자치기 소리’란 ‘마구 불러제끼는 소리’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를 ‘목으로 우기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전력을 다하여 고음으로 마구 내지르는 소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김소희 같은 사람은 일부 동편제 소리꾼을 가리켜 발음이 부정확할 정도로 너무 소리를 되게(고음으로)만 한다고 불만을 얘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정색을 하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여 발성을 하면 자연히 소리는 무겁게 된다. 이런 소리에는 기교를 부릴 틈이 없다. 따라서 소리를 “잔재주가 들지 않으며, 긴 빨래를 널 듯이 쭉쭉 펴서 뻗어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송만갑의 소리에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현재 남아 있는 송만갑의 소리를 들어보면, 소리를 떨거나 꺾는 부분이 많지 않고 평평하게 발성을 한다. 그리고 전력을 다하여 고음으로 소리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송만갑의 소리를 가리켜 ‘고공에서 노는 재주로는 최고’라고 하기도 한다.

발성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소리 끝을 길게 빼지 않고 짧게 끊어서 낸다는 점이다. 큰 소리로 소리 끝을 끊어서 내기 때문에 “소리 마디마디가 분명하게 떨어져서 마치 도끼로 큰 나무를 패듯이 쩡쩡 울린다”고 한다. 소리 끝을 짧게 끊어내는 데다가 떨거나 꺾는 기교를 별로 부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 자연히 템포가 빨라지게 된다.

템포가 늘어지는 것은 소리를 길게 빼면서 여기에 여러 가지 기교를 부리기 때문이다. 물론 기교를 부리지 않는 발성을 하면서도 휴지를 길게 가져가면 템포는 늘어질 수 있겠으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는 불가능한 창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동편제 소리는 “소리를 들고 나간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들고 나간다는 것은 사설의 구절 끝 부분에서 소리 끝을 살짝 높이는 발성을 말하는데, 이는 동편제 소리꾼 중에서도 송만갑의 소리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특징이다. 소리 끝을 살짝 높이면서 짧게 끊어내면 단호하면서도 힘찬 느낌을 준다. 슬픈 감정을 나타내는 계면조에 Do에서 Si에 이르는 미분음적 하강음이 존재하는 것과 대비되는 이러한 특성은 동편제가 씩씩하고 힘찬 느낌을 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침새는 소위 대마디대장단을 사용한다. 부침새는 장단의 박에 말을 ‘붙이는’ 방식을 말하는데, 대마디대장단은 부침새에서 규격과 규칙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운용 방식이다. 대마디대장단의 상대가 되는 것은 엇부침인데, 이는 규격에서 어긋나는 말붙임으로 특별한 효과를 창출하는 기교적인 장단 운용 방식을 말한다.

동편제 판소리의 부침새가 정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규격에 충실한 장단 운용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편제 소리는 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원칙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으려는 경향은 너름새에도 이어진다. 너름새는 육체적 표현 동작을 가리키는 말인데, 신재효 이후 너름새는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었고, 이에 따라 이를 정교하게 구사하려는 경향이 증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편제 소리꾼은 이런 연극적 표현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강도근 같은 사람은 공연 내내 거의 뻣뻣이 서서 소리를 했다. 부채마저도 그저 손에 쥐고 있다고 할 정도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동편제 소리꾼들이 ‘소리’ 중심의 판소리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니까 동편제 소리꾼은 ‘소리’ 이외에는 아무 데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소리에만 전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특징은 결국 동편제 판소리가 고졸하다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다. 단순하고 건조한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자연히 씩씩하고 투박한 남성적인 힘이 있다. 우조를 주조로 해서 소리를 엮어간다는 것은 이런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한다. 송만갑의 「이별가」는 이런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춘향과 이도령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장면을 노래한 이 대목에서 송만갑은, 끝을 들어올리며 급히 끊어내는 힘찬 소리로 두 사람의 이별을 그려낸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슬픔이 별로 없다. 얼핏 보면 참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력을 다하여 감정을 절제하고, 소리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치열한 예술 정신이 깃들어 있다. “정대하고 시원한 소리요 전체를 엉구고 한 자 한 귀를 소홀히 하지 않는 엄격한 창법”이란 평가는 이래서 가능한 것이다. “동편은 우조를 주장하여 웅건 청담하게” 한다는 정노식의 말도 이런 특징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편제 판소리의 예술적 지향을 이렇게 파악하고 보면, 결국 동편제가 양반의 미의식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제, 정대, 씩씩함 등은 대표적인 사대부 음악인 가곡의 미의식과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인 평가이기는 하다. 아무래도 판소리는 계면조를 바탕으로 하여 생성 발전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편제 소리가 양반의 미의식을 발견하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하나의 ‘법제’를 이룰 수 있었으며, 그 전통을 줄기차게 이어오면서 남성적 감성을 유지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남원 소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철성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철성이란 문자 그대로 쇠처럼 단단한 소리를 가리킨다. 철성은 수리성이면서도 통성으로 고음을 낼 때 나는 소리이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치열한 맛을 남원 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철성 때문이다.

철성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성대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성대가 나쁘면 아무래도 단단한 고음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거칠면서도 단단하고 높은 철성이야말로 동편제 판소리가 최종적으로 이른 지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동편제 판소리가 철성을 기막히게 구사한 송만갑의 소리를 모범으로 삼아 형성되었던 것이다.

남원 소리가 철성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동편제 소리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원 소리는 현대의 청중들에게는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철성, 통성 위주의 소리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심한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남원 소리는 전환점에 서 있다. 전통을 고수하다가 화석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전통의 창조적 변용으로 청중들 속에 살아 있는 예술로 발전해 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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