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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918
한자 姜道根
영어음역 Kang Dogeun
이칭/별칭 강맹근(姜孟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435[향교길 25]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판소리 명창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435[향교길 25]지도보기
성별
생년 1918년연표보기
몰년 1996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대표경력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흥보가」 예능 보유자[1988년 12월 1일]

[정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현대 판소리 명창.

[개설]

강도근의 호적명은 강맹근(姜孟根)이며, 아버지 강원종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의 9남매 중 넷째로, 1918년 지금의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강도근은 동편제 판소리 「흥보가」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지킨 판소리 소리꾼이었다. 통성 위주의 목으로 소리 끝을 짧게 끊어내며, 대마디대장단을 충실하게 구사하는 강도근의 소리는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도근은 항상 “자작(自作)은 안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강도근이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온 창자였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강도근의 목소리는 철성으로, 송만갑, 김정문으로 이어진 동편제 판소리의 특징적인 목인데, 현대 판소리 창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철성을 가졌다.

강도근은 판소리가 거의 사멸 지경에 이르렀던 1970~80년대에 남원국악원의 창악 강사로서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동편제 판소리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남원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최후 보루라는 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활동사항]

강도근은 17살 되던 해인 1934년 김정문을 찾아가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를 완전히 배우고,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일부 배운 뒤, 18살 되던 해에는 박중근의 협률사에서 처음으로 공연에 참여하였다. 협률사를 그만둔 뒤에는 상경하여 송만갑으로부터 「흥보가」를 더 배웠다.

25살 때 구례로 내려간 강도근박봉술, 강산홍 등과 함께 명창 박봉래의 동생이며 박봉술의 형인 박봉채에게 지도를 받는 한편,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을 하였다. 독공을 마친 후, 당시 하동군 악양에 살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2개월여에 걸쳐 「수궁가」를 배웠다.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등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뒤, 강도근은 해방을 전후해서 창극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호남창극단 등을 전전하며, 조상선, 박동실, 임방울, 정남희, 오태석, 정광수, 공기남, 임준옥, 박초월, 박봉술, 김연수, 김소희 등과 공연을 하면서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보냈다.

해방을 맞이한 날도 박동실(朴東實)의 호남창극단에 속해 있으면서 경상남도 통영(지금의 충무)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창극단이 해체된 뒤에는 서울, 목포, 전주, 익산, 여수, 순천, 부산 등의 국악원에서 제자를 가르쳤으나, 1973년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부임한 이래, 1990년까지 강도근은 계속 남원에 머물며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강도근은 안숙선, 오갑순, 강정숙, 홍성덕, 강정렬, 이난초, 전인삼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저술 및 작품]

음반으로 「강도근 창 흥보가」(신나라뮤직, 3CD), 「강도근 창 수궁가」(스페셜유통, 3LP), 「강도근 창 판소리 흥보가」(NICES, 3CD), 「강도근 창 흥보가」(세일, 3LP), 「강도근 적벽가」(1CD, 국립민속국악원)가 있다.

[상훈과 추모]

한국국악협회 국악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장 문화장(1985), KBS 국악대상(1986), 자랑스런 전북인의상 대상(1988),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1991), 동리대상(1992)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 12월 1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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