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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674
한자 梁誠之
영어음역 Yang Seongji
이칭/별칭 순부(純夫),눌재(訥齋),송파(松坡),문양(文襄),남원군(南原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경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성별
생년 1415년연표보기
몰년 1482년연표보기
본관 남원
대표관직 홍문관대제학|대사헌|이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송파(松坡). 시조 병부공 양능양(梁能讓)의 13세손이며 아버지는 증우찬성(贈右贊成) 양구주(梁九疇)이다.

[활동사항]

양성지[1415~1482]는 1441년(세종 23)에 생진문과(生進文科)에 합격하여 경창부승(慶昌府丞)과 성균전적(成均典績)을 역임하였다. 훈구파(勳舊派) 중진으로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과 고려사수사관(高麗史修史官)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했다.

이어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승진하여 1453년(단종 1)에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와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했고,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임금에게 지어 올렸으며 1455년(세조 1)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하여 바쳤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左輔德)으로 전임되었으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463년(세조 9) 왕명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집하고 이 해 홍문관(弘文館) 설치를 건의하여 역대의 서적을 보관케 하고 제학(提學)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464년(세조 10)에는 구현시(求賢試)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재직 중에 『오륜록(五倫錄)』을 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1465년(세조 11)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서적의 보관과 간행을 건의하는 10조항의 상소를 올려 학문의 발전을 꾀하였고 이듬해에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1469년(예종 1)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와 홍문제학(弘文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며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이듬해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공조판서 재임 중에 남원성을 쌓으라는 어명을 받고 남원성을 쌓아 오늘날 남아 있는 남원성의 모양을 갖추게 하였다.

1477년(성종 8)에 대사헌으로 재임(再任)되었다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었다. 1481년(성종 11)에는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다.

[학문과 사상]

양성지는 군정10책, 비변10책(備邊十策) 등을 건의하여 국방 강화를 주장하였고, 국방 관련 『팔도지리지』와 『연변방수도(沿邊防戍圖)』 같은 각종 지리서를 만들었다. 여진 등의 외적 방어를 위해 무인 우대 및 정병주의(精兵主義)를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 임금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절에 단군을 국조로 받들기를 주장했으며, 중국의 역사만을 가르치던 시절에 자국사인 ‘동국사(東國史)’를 배울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사회 정책에 대하여도 한층 진보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예컨대, 백정(白丁)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고, 노비에게만 힘든 역을 치중하지 말고 균등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 등이다. 또한 풍속에 대해서도 개혁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혼례를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과거 시험에 대하여도 과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였으며 아악의 보호 및 체계적 정리를 주장했다.

또한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조정에서 간행한 모든 서책들을 비롯하여 선비들이 저술한 서책들도 모두 수집, 간행하여 보관케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와 같은 건의는 300여 년이 지난 정조 때에 실현되었다.

[저술과 작품]

저서로는 『눌재집(訥齋集)』·『유선서(諭善書)』·『삼강사략(三綱史略)』 등이 있고, 편저로는 『동국도경(東國圖經)』·『농잠서(農蠶書)』·『축목서(畜牧書)』 등이 있다.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편찬했다. 또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집했고, 『오륜록(五倫錄)』·『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지었으며, 『세종실록』·『예종실록』·『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다.

[묘소]

묘서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1973년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양성지의 묘소 아래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였으며 그곳 지명을 따서 대포서원(大浦書院)이라 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30 인물 생몰년 추가 활동사항에 생몰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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