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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554
한자 南原鄕校
영어음역 Namwon Hyanggyo
영어의미역 Namwon County School
이칭/별칭 교궁(校宮),재궁(齋宮)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512[향교길 4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찬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조선시대 지방 교육 기관
건립시기/일시 1410년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512[향교길 43]지도보기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문화재 지정일 1971년 12월 2일연표보기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도호부 내의 남원 유생들을 위한 국립 중등 교육 기관.

[개설]

남원향교는 조선시대 숭유정책에 따라 전국 모든 행정 구역에 설립된 교육 기관 중의 하나로, 공자를 비롯한 4성(四聖 :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송나라 때의 6현(六賢 :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대 18현인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원 백성들의 중등 교육과 교화를 담당한 국립 시설이다.

남원향교에서는 향교의 운영과 관련하여 향교 내의 학규(學規)를 명시한 향교 유생들의 내무 생활 규범 18개 조항을 만들어 이를 준수하는 등의 학풍을 수백 년째 간직하고 있으며 매년 두 차례의 석전대제와 1597년 남원성 싸움에서 산화한 24현에 대한 춘향(春享) 제례를 지내고 있다.

특히 남원향교 시설인 진강루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과거 남원성 내의 동헌의 문루로 쓰였던 환월루가 일제에 의해 문화재적, 역사적 가치가 훼손될 위기에 처해지자, 남원의 지역 유지들이 의연금을 걷어 환월루를 현찰 매입한 뒤 분해와 조립 과정을 통해 남원향교의 출입문격인 진강루로 재탄생시킨 일화는 남원향교의 중요성과 위상을 가늠케 해주는 사례이다.

[변천]

1410년 남원향교가 설립된 당시 남원도호부에서는 70명, 남원 관할의 행정군에서는 50명, 행정현에서는 30명 정도를 선발하여 교육을 시켰다. 최초 남원향교 건립지는 남원성에서 4㎞ 떨어진 대곡산이었다.

그러다 향교에서 매년 치르는 큰 행사인 석전대제일이 되면 호랑이가 나타나 남원도호부의 부민들이 크게 놀라는 사건이 2~3년 지속되자, 1428년(세종 10)에 남원향교의 전교(남원향교의 최고 지도자) 등의 지도부가 향교를 현재 남원시 춘향교 요천 너머의 남원 관광지가 위치한 덕음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당시 덕음산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큰 하천인 요천에 설치되어 있던 섶다리 등의 교각이 홍수 등에 취약해 많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향교로 가는 길목인 요천을 건너갈 수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1443년(세종 25년)에 다시 남원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왕산(王山) 자락인 현재의 자리에 남원향교를 다시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해 향교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당시 유명한 유림 가문이었던 남원 부호 진사 유인옥이 1599년(선조 32)에 사재를 털어 향교의 가장 중요한 제례 공간인 대성전을 재건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는 교육 강당인 명륜당 역시 재건되었다.

그 후 역사적으로 남원향교의 시설은 많은 변천을 거듭하였다. 특히 1748년(영조 24)에는 진사 한동섭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재건하였고, 1772년(영조 48)에는 허관과 황건이 재실을 수축하였다.

또한 1829년(순조 29)에는 사마재가 재건되었으며, 1850년(철종 1)에는 남원부사 김병교남원향교를 크게 중창하였고, 1876년(고종 13)에는 화재로 전소된 명륜당 건물을 남원부사 오달선과 유림 대표 72명이 모은 총 3,755량의 자금으로 다시 세웠다.

구한말인 1892년(고종 29)에는 다시 남원부사 민종열에 의해 남원향교 내의 대성전도 크게 중수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대성전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남원향교의 현존 시설로는 정문 시설인 진강루와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편에는 좌우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유교 성현을 모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8호)이 있다.

대성전은 높이 150㎝인 화강암의 석축 위에 팔작지붕과 겹처마가 있는 건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대성전 안에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대성전 왼쪽에는 사마재, 고직사, 교육관 등 부속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전라감사 윤안성과 남원부사 성안의의 주도 하에 지역 유지인 박대옥과 유인옥의 도움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재건하였다.

[현황]

남원향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를 봉행해 왔으나 2007년부터의 석전대제는 양력 5월과 9월로 바꾸어 전국 모든 향교에서 봉행되는 석전대제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남원향교의 명륜당을 비롯한 서고에는 조선시대 남원 선비들의 교육 기관답게 많은 서책 보유량을 자랑하고 있다. 비록 남원향교의 서고가 1876년(고종 13)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현재 『사서삼경』 등을 포함한 귀중한 문집 등 600여권의 장서가 보존되어 남원 지방 사료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남원향교 직제 규정에 의해 전교(典校)와 장의(掌議)를 비롯하여 남원향교 사무국이 설치되어 남원향교의 총괄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더불어 남원 유림의 지역 사회 봉사와 전통 문화 확산을 주도하는 사업을 개발하여 1988년부터는 남원향교의 대중화를 위해 명륜학당(충효관)을 설치하여 남원 시민에게 생활 예절과 한문, 서예 등의 무료 전통 문화 강좌를 강론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남원향교는 향교 재정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조선시대 하사받은 700두락의 토지 관리 체계를 정비하고, 1949년 전북향교유지재단을 설립하여 남원향교의 재산을 전북대학교 건립을 위해 기부하는 등 향교 재산의 쓰임새를 현대화하였다.

현재 남원향교 유도회와 위성계를 통해 향교 재정을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운영에 충당하는 등 효율적이고 모범적인 재정 관리 체계를 갖추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유례가 드문 남원향교만의 특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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