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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062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음역 dongnip undongga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동희

[정의]

일제강점기에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활동가들.

[개설]

일본 제국주의는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며 조선 식민지 지배를 노골화했고, 결국 조선은 1910년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 양반 사대부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남원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여 일제에 항거하고 국권 회복과 민족 자주성을 되찾는 데 기여하였다.

[3·1운동 시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하나였던 백용성남원군 산동면 출신이다. 남원 지방에서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유태홍으로 남원군 이백면 남계리 출신이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1919년 4월 3일 남원 덕과면에서 이석기 면장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전날 있었던 덕과면 만세 운동 주동자들이 남원읍내로 압송되는 날로, 방극용·형갑수·최병현 등이 주동하여 덕과면·사매면민들을 중심이 된 북시장에서의 만세 운동과 천도교·기독교측이 중심이 된 광한루 앞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와 합세하였다.

[3·1운동 이후 시기]

3·1운동 이후 만세 운동의 열기는 야학을 조직하여 농촌 계몽과 더불어 애국 사상을 고취시키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지원하는 등의 형태로 이어졌다.

박기영(朴琪永)은 1919년 8월 29일 「국치일 경고문」을 인쇄하여 외국 영사관과 국민들에게 배포하며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애국 애족 정신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며 그의 형 박권영박정석 등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두석은 우리나라의 독립 쟁취는 문맹 퇴치와 농촌 경제 건설이 우선이라고 믿고 그의 형 이두현과 함께 수양전진계(修養前進稧)를 조직하고 야학을 개설하였다.

[1920년대]

남원 지방에서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 단체의 하나로 조선독립대동단 전라북도지부가 있다. 대동단은 1920년 김가진·전협보·최익환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독립 운동 단체인데, 1920년 7월 중순 경남 진주 출신의 대동단원 김재구와 남원군 사매면 오신리의 강경진이 만나면서 남원 지방에서의 조직 활동이 시작되었고 강경진과 같은 사매면 출신 한태현이 전라북도지부를 결성하였다.

조선독립대동단 전라북도지부는 서울 본부와의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남원에서 활동하였는데, 주된 목표는 항일 운동에 동조하는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중앙본부를 통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이었다. 이때 형갑수는 사재 2백 원을 헌금하였다.

이 단체는 일본 경찰의 예리한 감시 추적을 받다가 결국 1922년 9월 전라북도지부의 임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한태현·강경진·이범수·형갑수 등은 모두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그 외 1926년경의 항일 단체로 남원청년동맹·신간회(新幹會)·형평사(衡平社) 등 항일 운동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두용·최영식·박기영·양주하·이광수 등이 참여하여 문맹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일제 말기]

일제 말기 남원 지방에서의 대표적인 항일 운동으로 5·13투옥사건이 있다. 이십대 전후의 남원 지역 젊은이들이 항일 투쟁의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당시 남원군청 내무과 근무하던 노상인의 집에서 만나, 민족 의식과 독립 사상 고취를 위한 독서 운동, 일본의 민족 차별과 탄압 정책 폭로를 위한 유인물을 제작 배포, 징병을 피해 지리산에 은신했다가 미군이 상륙하면 바로 동참할 준비를 할 것 등을 합의하고 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활동은 1945년 5월 초 운봉금융조합에 근무하던 박주영이 남원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의하여 체포되는 것을 시작으로 장홍식·노상인·정영필(보절국민학교 교사)·정인호(순천 조흥은행원) 등이 구속되고 며칠 뒤에 다시 서태규·이정옥·노형봉·이현필·노종선 등이 연행 구금됨으로써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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