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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985
한자 趙慶男
영어음역 Jo Gyeongnam
이칭/별칭 선술,산서,주몽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성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인|유학(幼學)자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원천 내촌리
성별
생년 1570년연표보기
몰년 1641년연표보기
본관 한양조씨
대표관직 호조참판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인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한양.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 우의정 양경공 조연(趙涓)의 후손이며, 사직 조벽(趙璧)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조경남은 일찍 부모를 잃고 외조모에게서 자랐다. 효성이 지극해 6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색동옷을 사양하고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미음만 먹으며 3년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의병을 일으켜 유격장으로 활약하였다. 동지 정사달 등을 규합하여 십여 차례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남원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조경남은 명나라 장수 양원을 찾아가 교룡산성의 수비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성을 막을 대책을 말하였으나 양원은 이를 듣지 않았고, 마침내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 조경남은 동지들과 더불어 불우치에 병사를 매복하는 계책을 쓰며 적과 접전 끝에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어 궁장치에 이르러 학성군 김완·박언량 등과 함께 적을 쳐서 대파하였다.

그리고 산동원까지 적을 추격하여 거기에서도 세 군데에 병사를 매복시켜놓고 밤에 왜군의 군막을 공격하니 이에 놀란 적병이 자기들의 막사를 불지르고 도망갔다. 그는 승세를 몰아 추격하여 적병 200여 명을 베었다.

이어서 산음과 탄곡에 나아가서 적이 세 곳으로 나누어서 군막을 설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 판관 안사제, 진사 정사달 등과 함께 군사를 세 곳으로 나누어서 밤을 타서 잠입하여 적의 군막을 불질렀다.

조경남은 또 적군이 요천에 진을 치고 들판의 곡식을 거두고 있자, 박언량을 시켜 곡성으로 가는 길에 병사를 매복하였다. 그리고는 밤을 이용해 습격하여 적을 대파하니 적이 곡성 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도망가는 적군을 섬멸하였다.

1598년 병사 이광악의 막하로 종군하였는데 이 때 명나라의 도독 유정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 연일 교전하여 활을 쏘아 번번이 적병을 없애니 도독이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세 가지 재주를 배우고 갖추었으며, 가슴에는 만 개의 갑옷이 갈무리 되어 있다.”라 하고 언제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또한 이부총은 그를 가리켜 문무의 재주를 모두 갖추었다고 칭찬하며 그의 사적을 『동정기』에 수록하였다.

[학문과 사상]

인조 때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성리학에 달통하였으며 병가의 법에 조예가 깊었다. 자라서는 중봉 조헌(趙憲)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의 학문과 실천궁행의 요체를 터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산서잡록(山西雜錄)』 8권이 있다. 이 책은 그가 13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이며 난중의 일도 기록되었다. 이 밖에 『제례의』·『성리석』·『오상록』·『소견록』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81년(숙종 7)에 고을사람들이 신포에 주포서원을 지어 제향하였다. 1861년(철종 12)에 남원의 유림 박창규 등의 상소로 호조참판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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