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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816
한자 金元重
영어음역 Kim Wonjung
이칭/별칭 사위,당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출신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아산리
성별
본관 경주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약한 의병.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위(士威), 호는 당계(堂溪).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의 후손이고, 참판 김성진(金聲振)의 아들이다.

[개설]

김원중은 효성이 지극하고 몸가짐이 간결하며 절의가 있었다. 광해군 때인 1618년(광해군 10)에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사건이 일어나자, 윤리가 무너짐을 슬퍼하고 남원에 은거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고, 신흠(申欽)이 동궁을 모시고 남으로 내려왔다. 이 때 조정에서는 그 임무가 막중함을 알고 김원중김원립(金元立) 형제에게 행차에 참여하도록 하여, 형제는 동궁을 모시고 전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난은 이미 평정된 뒤여서 형제는 분통함을 억누르며 고향에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에는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통곡하며 일가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각각 100석의 군량을 내고, 집안의 노비 50명을 거느린 다음 각처에 통문을 내어 의병을 모았다. 그들은 청주를 거쳐 과천에 이르는 동안 많은 적군을 격퇴하였다.

남한산성으로 갈 무렵 팔촌 동생인 독전어사(督戰御史) 김경여(金慶餘)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인조의 큰 칭찬을 들었다. 그러다가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하고, 그로부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김원중은 1656년(효종 7)에 부친 김성진의 공훈에 힘입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음직(蔭職)을 받았고, 용대사(龍臺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05.14 제향 사찰명 수정 오 : ...용추사에 제향되었다. 정 : ...용대사(龍臺祠)에 제향되었다.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남원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남창의록을 남원시에서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족보에 용대사에 제향되었다 되어 있다면 그것이 맞을 것이라 생각됩니다.감사합니다. 2012.05.14
김** 우선 12대조부이신 당계공의 기록을 인터넷에서 찾게되어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호남창의록에 기록이 보인다고 하는데, 혹 남원시에서 이 글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 족보에는 용대사(龍臺祠)에 제향되었다는데, 용추사는 용대사의 이명입니까? 아니면 옮겨 모셔진 것입니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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