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1329
한자 德麟齋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남길 4-7[봉황리 546-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62년연표보기 - 덕린재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45년 이후 - 덕린재 증축
현 소재지 덕린재 -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남길 4-7[봉황리 546-5]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목조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밀양박씨 어변당공파 와지문중
관리자 밀양박씨 어변당공파 와지문중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에 있는 밀양박씨 어변당공파의 조선 후기 강학소.

[개설]

덕린재(德隣齋)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와지마을에 시천한 박주택(朴周宅)[1778~1840]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손자 박태욱[1833~1883]이 1862년(철종 13) 건립한 강학소이다.

편액 이름은 죽일 손종서(孫鍾瑞)가 자신이 지은 「덕린재기」[1864]에서 밝히고 있듯이, 재실이 마을 남쪽의 덕산(德山)에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는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취하였다고 하였다. 박주택은 어변당공파 파조로 16세기 왜구 퇴치에 큰 공로를 세운 명장 박곤(朴坤)의 9세손이고, 어변당(魚變堂)을 중수한 죽림재(竹林齋) 박세용(朴世墉)[1685~1773]이 박주택의 고조할아버지이다. 박주택은 산수가 수려한 봉황리에 복거하여 아들 여섯 형제를 낳아 모두 일가를 이루게 하였는데, 손자 덕암 박태욱(朴泰郁)의 아들이 전라좌수사와 부산진첨사를 지낸 구계 박기우[1856~1902]이다. 덕린재 뒤쪽에는 박기우의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940년 지은 영정각(影幀閣)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허물어진 재실을 광복 후 후손들이 중수하였고, 정문 이름은 영덕문(迎德門)이다. 인근 동북쪽 산기슭에는 박태욱의 동생 박근욱[1839~1917]을 추모하는 사죽당(思竹堂)이 있다.

[위치]

덕린재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546-5번지에 있다. 봉황리 와지마을 표지석에서 방동 꽃새미마을 방향으로 약 500m 가면 왼쪽으로 덕린재가 있는 와지마을이 나온다.

[형태]

덕린재는 목조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의와 평가]

덕린재를 통하여 밀양박씨 어변당공파 후손의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와지마을 정착과 밀양박씨의 지역 내 분포지를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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