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99
한자 鄭云敬
영어공식명칭 Jeong Yun Kyeong
이칭/별칭 염의(廉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05년연표보기 - 정운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26년 - 정운경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330년 - 정운경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31년 - 정운경 상주목사록 보임
활동 시기/일시 1343년 - 정운경 지밀성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6년 - 정운경 하정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348년 - 정운경 양광도안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9년 - 정운경 교주도안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52년 - 정운경 전법총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53년 - 정운경 전주목사 보임
활동 시기/일시 1356년 - 정운경 병부시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57년 - 정운경 비서감보문각직학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58년 - 정운경 지형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59년 - 정운경 형부상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3년 - 정운경 검교밀직제학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정운경 영주로 귀향
몰년 시기/일시 1366년연표보기 - 정운경 사망
부임|활동지 밀성 - 경상남도 밀양시
묘소|단소 정운경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산69-2
사당|배향지 문계서원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성격 관인
성별 남성
본관 봉화
대표 관직 밀성군지사|전주목사|병부시랑

[정의]

고려 후기에 밀성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정운경(鄭云敬)[1305~1366]의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봉화정씨 시조로, 봉화현 호장 정공미(鄭公美)이다. 할아버지는 비서랑동정 정영찬(鄭英粲)이고, 아버지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정균(鄭均)이며, 부인은 우연(禹淵)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아들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참판 정도존(鄭道尊)·한성판윤 정도복(鄭道復)이다. 사위는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1343~?]이다. 정운경은 작위가 낮아 시호를 얻지 못하였으나, 정운경을 아끼는 친우들이 정운경의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염의(廉義)라는 사시(私諡)를 주었다.

[활동 사항]

정운경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집에서 성장하였고, 영주(榮州)와 복주(福州)[안동]의 향교에서 수학한 뒤 외삼촌 한림(翰林)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에 올라와 12도(十二徒)와 교유하였다. 이때 친분을 가진 인물이 가정(稼亭) 이곡(李穀) 등이다.

1326년(충숙왕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330년 문과에 급제하여 1331년 상주목사록(尙州牧司錄)에 보임되었다. 이후 내직에 들어와 전교교감(典校校勘)이 되고, 주부(注簿)·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삼사도사(三司都事)·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전의주부(典儀注簿)로 거듭 승진하여 홍복도감(弘福都監)의 판관(判官)이 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나갔다. 이때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인에게 대여하였던 포(布)의 징수를 종용하고자 어향사(御香使) 안우(安祐)에게 청탁하여 밀성군에 공문을 보내 징수하려 하였지만 정운경은 묵살하고 집행하지 않았다. 밀성군에 도착한 안우가 전에 보낸 공문의 이행 여부를 묻자, 정운경은 “밀성 사람에게 베를 빌려 준 사람은 조영휘이니, 조영휘가 징수할 일이지 공이 물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우가 정운경을 욕 보이려 하자 정운경은 안우가 공정하지 않다고 하여 크게 꾸짖고 욕 보였다. 이러한 행보는 이어져 다음 해인 1344년 복주목의 판관에 전임되어서도 정실에 기울지 않으며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였다.

정운경은 삼사판관을 거쳐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1346년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 뒤 성균사예·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를 지냈다.

1348년(충목왕 4)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1349년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등을 거쳐 1352년(충정왕 3)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이르렀다. 공민왕은 정운경이 법을 잘 지키면서 권세가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하여 술을 하사하였다. 1353년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로서 전주목사로 보임되었고, 1356년(공민왕 5) 병부시랑에 올라 무반의 전선(銓選)[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57년 비서감보문각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로 옮겨 강릉도(江陵道)와 삭방도(朔方道)의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찰하였다. 1358년 지형부사(知刑部事), 1359년 형부상서, 1363년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제수되었다.

1365년 병이 들어 사퇴하고 영주(榮州)에 돌아와 1366년 사망하였다.

[묘소]

정운경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산69-2에 있다. 봉화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정운경은 1832년(순조 32)에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문계서원(文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후 문계서원은 고종 때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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