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68
한자 李伯常
영어공식명칭 Lee Baeks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34년 - 이백상 강화군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37년 - 이백상 강원도 양주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이백상 경주목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48년 12월 - 이백상 밀양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50년 - 이백상 덕민정 건립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이백상 판선공감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이백상 판사로 원종공신 3등에 서록
활동 시기/일시 1463년 - 이백상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가 정조(正朝)를 하례
활동 시기/일시 1463년 - 이백상 한성부좌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7년 - 이백상 총리사 임명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1월 2일연표보기 - 이백상 『협주명현십초시』 보물 지정
부임|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묘소|단소 이백상 묘소 -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무능리 산40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양성(陽城)
대표 관직 밀양도호부사

[정의]

조선 전기 밀양도호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이백상(李伯常)[?~?]의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고려 삼중대광금오위대장군첨의평리개성윤(三重大匡金吾衛大將軍僉議評理開城尹)을 역임하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하여진 이정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광정대부도첨의평리판밀직사사상호군(匡靖大夫都僉議評理判密直司事上護軍)을 역임하고 양성군에 봉하여진 이수방(李守邦)이며, 할아버지는 고려 정의대부총랑상서응양상장군(正議大夫摠郞尙書鷹揚上將軍)을 역임한 이원부(李元富)이다. 아버지는 삼사우윤판군기사사(三司右尹判軍器寺事) 이징(李徵)이고, 어머니는 판서(判書) 유궤(柳潰)의 딸 진주유씨(晋州柳氏)이다. 이백상은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부인은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1368~1438]의 딸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계실(繼室)은 남부록사(南部錄事) 배렴(裵廉)의 딸인 김해배씨(金海裵氏)이다. 자식은 진사(進士)를 지낸 큰아들 이인동(李引銅), 왕자사전(王子師傳)을 지낸 둘째 아들 이인석(李引錫), 부정(副正)을 지낸 셋째 아들 이인종(李引鍾)이 있다.

[활동 사항]

이백상은 일찍이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있을 때에 도둑이 많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자 포졸을 풀어 모두 소탕하였다. 이후 1434년(세종 16) 강화군수(江華郡守)를 지내다가 1437년(세종 19) 강원도 양주부사(楊洲府使)로 부임하였다. 양주부사로 있을 때 세종(世宗)[1397~1450]이 강원도 지역에서 강무(講武)를 하였는데, 성심껏 국왕을 시봉하였다. 이러한 선정으로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1447년(세종 29)에도 황주목사(黃州牧使), 경주목사(慶州牧使)를 겸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448년(세종 30) 12월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로 부임하였다. 1450년(세종 32) 9월 밀양부 속현인 수산현(守山縣)[지금의 밀양시 하남읍] 서쪽 언덕에 덕민정(德民亭)[가운데 세 칸, 좌우에 각각 세 칸]을 세우고 주변 논밭을 개간하여 연간 수백 섬을 수확하게 하여 현의 경비로 충당하였다. 또한 멱례리(覓禮里)[지금의 하남읍 명례리], 감물지리(甘勿池里)[지금의 단장면 감물리] 등은 강가에 있어 장마 때마다 물에 잠겨 마을 수백 호가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가엾게 여기어 산언덕에 터를 잡아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백성들이 옮겨 산 땅은 샘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어 생활이 안정되었다. 1453년(단종 1) 이백상은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로 지내다가, 1455년(세조 1)에 판사(判事)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서록되었다. 이후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1463년(세조 9)에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명나라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함길도에 변란이 일어나자 세조(世祖)[1417~1468]는 총리사(摠理使)에 임명된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貫)과 이백상으로 하여금 병선(兵船), 조선(漕船)을 만들 제도를 의논하게 하였다. 또 신숙주에게 명하여 이백상과 더불어 마포에 가서 배를 운행하여 시험하게 하였다. 나중에 이백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柩府事)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백상은 밀양도호부사로 재직하고 있던 1452년에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보물]를 중간하였다. 『협주명현십초시』는 과거 시험 준비생의 수요를 염두에 두고 중국과 신라의 시인 30명의 작품을 모아 엮은 시선집(詩選集)이다. 조선 전기 문신인 권람(權擥)[1416~1465]의 교정을 거쳐서 간행하였으며, 활자본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백상이 『협주명현십초시』를 중간한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중간 연도인 1452년은 진사시가 다시 시행되던 해여서, 이와 관련하여 중간하였으리라 본다. 이백상이 중간한 『협주명현십초시』는 2017년 1월 2일 보물로 지정되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이백상의 묘는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무능리 산40에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