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431
한자 金太虛
영어공식명칭 Kim Tae-heo
이칭/별칭 여보(汝寶),박연정(博淵亭),양무(襄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김태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김태허 무과 별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김태허 옥포만호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김태허 밀양에서 의병 창의
활동 시기/일시 1593년 2월 - 김태허 당교 전투에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593년 10월 - 김태허 구강회맹 주도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김태허 충홍도병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김태허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김태허 밀양에 낙향하여 박연정 건립
몰년 시기/일시 1620년연표보기 - 김태허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 김태허 선무원종공신 1등 녹훈
추모 시기/일시 1622년 - 김태허 대학당 창건
추모 시기/일시 1827년 - 김태허 양무 시호 추시
추모 시기/일시 1830년대 - 김태허 덕양사 건립
추모 시기/일시 1864년 - 김태허 박연정 중건
추모 시기/일시 1944년 - 김태허 신도비 및 비각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66년 - 김태허 추유재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0년 - 김태허 충의사에 임란공신으로 위패 봉안
출생지 귀명리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연정 -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상동로 1034-7[고정리 902]지도보기
묘소|단소 김태허 묘소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의사 - 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학성동 45-1]
사당|배향지 대학당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성격 무신
성별 남성
본관 광주(廣州)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의병장이자 무신.

[가계]

김태허(金太虛)[1555~1620]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여보(汝寶), 호는 박연정(博淵亭)이다. 아버지 좌찬성(左贊成) 김희증(金希曾)과 어머니 월성박씨(月城朴氏) 사이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생원(生員) 김차무(金次武)이며, 할아버지 김려(金礪)는 장예원판결사(藏隸院判決事)를 지낸 것으로 전한다.

김태허는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서 태어났다. 부여백씨(扶餘白氏)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하여 활동하였으며 울산부사를 지냈다.

[활동 사항]

김태허는 1580년(선조 13) 무과 별시에 급제하였으며, 1582년 옥포만호(玉浦萬戶)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밀양에서는 밀양부사 박진(朴晉)의 지휘 아래 관민이 힘을 합쳐 대응하였으나 접전 끝에 패하였다. 다만 작원관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당시 산관(散官)으로 밀양에 머물던 김태허김유부(金有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 일원인 효평(孝坪) 지역에서 양산을 넘어 밀양으로 침입하여 오는 적을 토벌하였다. 작원관 전투 패배 이후를 전후하여 석동 석골사(石骨寺)에서 주둔하던 박진과 접촉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임진왜란 초기에 김태허가 공산[팔공산]에서 회맹에 참여하여 의병을 일으켰다는 견해도 있지만, 김태허가 팔공산회맹에 참여하고 「공산회맹일 여제의사공부(公山會盟日 與諸義士共賦)」를 지은 시기는 1596년으로 추정된다.

밀양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던 김태허는 1592년 9월 순찰사 김수(金睟)와 경상좌병사가 된 박진이 울산에서 창의한 의병과 관군을 통합하여 지휘할 임시 군수로 선임되었다. 김태허는 아이포(阿尔浦)[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 아이포마을], 경주 안강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고, 전쟁이 끝난 후에 정식 울산군수로 전임되었다. 울산군수로서 김태허는 1593년 2월 당교 전투에서 밀양부사 이수일(李守一), 밀양 의병 박수춘(朴壽春) 등과 같이 활약하였으며, 2차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에 참여한 손기양(孫起陽)과 함께 이견대, 봉길리 해변, 장기현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또한 1593년 10월에는 구강회맹(鷗江會盟)을 주도하여 울산 지역의 전투력을 고양시켰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지휘부와 일본군 사이에 강화 회담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김태허는 울산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고, 군사 확보 및 군량 공급에 주력하였는데, 이전에 김태허가 세운 전공에 대한 포상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화 회담의 결렬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전선이 다시 위급하여지자, 김태허는 입석 전투, 마등오 전투 등 소규모 전투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과의 대규모 전투였던 제1차 울산성 전투[도산성전투], 제2차 울산성 전투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1598년 10월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가 철군하자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가 울산왜성[학성]과 서생포왜성을 접수하고, 울산군수 김태허가 군민들을 이끌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이에 울산은 정상화되고 전후 복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때도 김태허의 활약이 컸다.

이후 김태허는 성주목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등을 역임하며, 관직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612년(광해군 4) 충홍도병사(忠洪道兵使)가 되었다가 1613년 무고(誣告)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이 밝혀져 다시 도총관과 호위대장(扈衛大長)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고향 밀양의 박연정(博淵亭)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태허는 1620년(광해군 12) 66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김태허의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태허는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선조로부터 『대학(大學)』 1부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무공신 3등에 녹훈이 거론되었지만 선무원종공신 1등 녹훈으로 결정되었다. 김태허가 하사받은 『대학』과 교지(敎旨), 유서(諭書), 공신녹권 등을 영구 보전하기 위하여 1622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대학당을 창건하였다.

김태허가 말년을 보내던 박연정은 손자 김부호가 경내를 확장하여 정당과 충의문(忠義門)을 중창하였는데, 얼마 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1864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건하였다.

김태허의 후손들이 조정에 시호(諡號)를 청원하였는데, 1827년(순조 27)에 양무(襄武)라는 시호가 내렸다. 또한 1830년대에 덕양사(德陽祠)를 건립하여 김태허와 조카 김수인(金守訒)을 함께 배향하였으며, 묘소 인근에는 양무공 박연 김태허 장군 신도비(襄武公博淵金太虛將軍神道碑)와 비각이 1944년에 건립되었다. 1966년에는 박연정 인근에 따로 추유재(追裕齋)를 세웠다.

김태허가 생전에 남긴 유시(遺詩) 「공산회맹일 여제의사공부」를 비롯하여 김태허의 사적과 관련 기록을 모은 『양무공실기(襄武公實記)』가 1884년(고종 21)에 후손들에 의하여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2000년 울산 충의사(忠義祠)에 임진왜란 공신으로 김태허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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