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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04
한자 尹世胄
영어공식명칭 Yoon Seju
이칭/별칭 소룡(小龍),세주(世洙),정수(正洙),소용(小用),석정(石正),석정(石井),석생(石生),석전(石田),석정(石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6월 24일연표보기 - 윤세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윤세주 밀양 3·13 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윤세주 『독립신문』 경남지국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 윤세주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독립 의열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말 - 윤세주 의열단의 자금 조달을 위하여 조선 입국
활동 시기/일시 1920년 6월 16일 - 윤세주 일본 경찰에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7일 - 윤세주 서대문형무소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윤세주 밀양청년회 상무집행위원 겸 체육부위원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12월 - 윤세주 신간회 밀양지회 총무간사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윤세주 중국으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 윤세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5년 7월 - 윤세주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부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5년 10월 - 윤세주 민족혁명당 훈련부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7년 1월 - 윤세주 제2차 당대회 청년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0월 - 윤세주 조선의용대 본부 훈련주임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39년 8월 - 윤세주 민족혁명당 대표 자격으로 7당통일대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1년 봄 - 윤세주 1·3혼정지대 정치위원으로서 북상 항일
활동 시기/일시 1941년 7월 - 윤세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으로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7월 - 윤세주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예변구 부지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1년 7월 - 윤세주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42년 5월 - 윤세주 일본군에 맞서 참전
몰년 시기/일시 1942년 6월 3일연표보기 - 윤세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윤세주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부내면 노하리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지도보기
묘소 태항산 - 중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민족혁명당 훈련부장|민족혁명당 대표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윤세주(尹世胄)[1901~1942]의 호는 석정(石正, 石井, 石亭) 또는 석생(石生), 석전(石田)이고 이명은 윤소룡(尹小龍), 윤소용(尹小用)이다. 윤세주는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재 밀양시 내이동]에서 아버지 윤희규(尹熺奎)와 어머니 김경이(金卿伊) 부부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윤세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조선인이 경영하던 동화중학(同和中學)에 편입하였다. 윤세주동화중학에서 비밀서클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하여 학우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동화중학이 폐쇄되자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윤세주는 밀양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독립신문』 경남지국장이 되어 민중들의 항일 정신을 북돋우기 위한 선전 공작에 힘썼다. 3·1운동의 주도로 일제 경찰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윤세주는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길림(吉林)에서 김원봉과 조우하여,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황상규(黃尙奎)·곽재기(郭在驥)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1919년 말 제1차 목표로 일제 요인 암살과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계획의 실행을 위하여 황상규·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윤세주는 서울과 밀양을 오가며 동지들과 함께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6월 16일 동지들과 거사 계획을 세우던 윤세주는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함께 체포되었다. 3·1운동으로 인해 당시 궐석재판에서 받은 1년 6개월의 징역형이 1921년 재판 당시 폭발물취체벌칙위반으로 받은 7년형에 가산되어 7년 뒤인 1927년 2월 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고향으로 내려간 윤세주는 밀양청년회 상무집행위원 겸 체육부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12월 신간회 밀양지회가 조직되자 총무간사를 맡아 지회장 황상규를 도왔다. 1928년 7월에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사임하고 신간회 지회활동에 전념하였다.

1930년대 들어 신간회가 해소되자, 윤세주는 민족해방운동의 활로를 새롭게 찾기 위하여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남경(南京)에서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의 옛 동지들과 해후하였다. 의열단이 1932년 10월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윤세주는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하기 위하여’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윤세주는 간부학교의 교관으로 발탁되어 조선민족해방운동사·의열단운동사·유물사관·정치경제학 등 사회과학 과목을 가르폈다. 이와 동시에 졸업생에게 공작 임무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윤세주는 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부원으로 선출되었고 한글판 기관지 『민족혁명』의 편집책임자로 활약하였다. 또 『앞길』이라는 기관지의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10월 김규식(金奎植)의 뒤를 이어 민족혁명당의 훈련부장에 취임하였고, 1937년 1월 제2차 당대회에서 청년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선임되는 등 당의 조직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윤세주는 조선의용대 본부에 배속되어 훈련주임과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의 주간을 맡아 일본군에 대한 대적선전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9년 8월 민족혁명당 대표로 기강(綦江)에서 열린 ‘7당통일대회’에도 참여하였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할 것과, 활동 지역을 조선인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화북·화중 지역으로 옮겨 일본군 후방 공작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1941년 봄 조선의용대 제2지대가 먼저 북상 항일의 길에 올랐고, 뒤이어 1·3혼성지대도 중국공산당 해방구로 이동하였다. 이때 1·3혼정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던 윤세주는 오랜 동지였던 김원봉과 결별하면서까지 북상 항일의 길을 택하였다. 태항산(太行山)에 도착한 조선의용대 제2지대와 1·3혼성지대는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고, 이때 정치위원으로 윤세주가 선임되었다. 또 윤세주는 새로 결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진기예변구(晉冀豫邊區) 부지회장을 맡았고, 동시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사로서 민족해방을 이끌어갈 청년 군정간부의 양성에도 힘썼다.

1942년 5월 일본군이 주력부대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중국공산당의 태항산 근거지를 공격하자, 조선의용대도 팔로군(八路軍)을 도우면서 참전하였다. 이때 윤세주는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뒤, 1942년 6월 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윤세주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인 『민족혁명』, 『앞길』 편집인으로서 「우리운동의 새 출발과 그 이론적 기초」, 「본당의 강령과 현단계의 중심 임무」 등을 썼다. 또한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통신』의 한문반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으로 임명되어, 기관지인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묘소]

윤세주는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한 진광화(陳光華)[본명 김창화]와 중국 공산당 군벌들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태항산 묘 아래에는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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