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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40
한자 金元鳳
영어공식명칭 Kim Won-bong
이칭/별칭 약산(若山),최림(崔林),진국빈(陳國斌),왕세덕(王世德),김암일(金岩一),이충(李冲),왕석(王石),김설봉(金雲峰),김국빈(金國斌),진충(陳冲),김약삼(金若三),김세량(金世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3월 14일연표보기 - 김원봉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5년 - 김원봉 서당에서 공부
수학 시기/일시 1911년 - 김원봉 밀양공립보통학교 자퇴
수학 시기/일시 1911년 - 김원봉 밀양 동화학교 편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김원봉 서울중앙학교 편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6년 - 김원봉 중국 천진 덕화학당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8년 - 김원봉 중국 남경 금릉대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김원봉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입학 후 자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원봉 길림에서 의열단 창설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 김원봉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5월 - 김원봉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4월 - 김원봉 월북
활동 시기/일시 1957년 9월 - 김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58년 11월연표보기 - 김원봉 사망
출생지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의열단 단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원봉(金元鳳)[1898~1958]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약산(若山)이다. 1898년 3월 14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아버지 김주익(金周益)과 어머니 이경념(李京念)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이경념은 김원봉이 네 살 되던 해 동생 김경봉을 낳다가 사망하였다. 아버지 김주익은 천연이(千蓮伊)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서모 박순남에게서는 3명의 이복 동생이 태어났다.

김원봉의 아들로 김중근과 김철근이 있다. 김원봉의 이칭으로는 최림(崔林), 진국빈(陳國斌), 왕세덕(王世德), 김암일(金岩一), 이충(李冲), 왕석(王石), 김설봉(金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冲), 김약삼(金若三), 김세량(金世樑)이 있다.

[활동 사항]

김원봉밀양면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밀양공립보통학교, 사립 동화학교, 서울의 중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뒤 중국으로 옮겨가 천진의 덕화학당(德化學堂), 남경의 금릉대학(金陵大學)을 다녔다. 3·1운동의 소식을 전하여 들은 뒤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1924년까지 국내외 각종 의열투쟁 의거를 지도하였다.

1925년 의열단의 활동 방향을 군대 건설로 바꾸고 단원들과 함께 중국 국민혁명의 진원지 광주로 이동하였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제4기를 졸업하고 중국 북벌운동에 참가하였다. 1929년 북경에서 안광천과 제휴하여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청년간부를 양성하였다. 1932년 본거지를 남경으로 옮기고 황포군관학교 동창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하였다. 또한 중국 관내 한인 혁명가들의 단결을 위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조직에 힘썼다. 이어서 1935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였고 서기부장을 맡았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여 강소성 성자현 소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청년 100여 명을 파견하여 정치 군사 훈련을 받도록 했다. 1938년 10월 군관학교 졸업생을 규합하여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1939년 7월 김구와 공동 명의로 「동지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한인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10월 이후 조선의용대의 주력을 화북 지역으로 이동시켜 더 많은 대원을 확보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12월에는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계속하여 화북의 조선의용군과 재통합을 시도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12월 초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하여 각 정파의 통합에 힘썼다. 1946년 2월 좌익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잔류하여 9월 국가검열상에 취임하였다.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고, 1958년 9월 모든 공직을 사임하였다. 김원봉은 1958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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