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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96
한자 鄭起龍 遺物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0년 8월 23일연표보기 - 정기룡 유물 보물 제669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5년 - 정기룡 유물 유서 1매, 교서 1매, 교지 1매 도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5년 - 정기룡 유물 교서 1매, 교지 1매 회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정기룡 유물 중 요대 도난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0년 - 정기룡 유물 중 요대 회수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6월 29일 - 정기룡 유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장처 상주박물관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경천로 684[삼덕리 361]
성격 유형문화재
재질 가죽|종이
크기(높이,길이,너비) 157㎝[요대 길이]|4.5㎝[요대 너비]|55㎝[신패 세로]|64㎝[신패 가로]|170㎝[1617년 교서 세로]|가로 52㎝[1617년 교서 가로]|300㎝[1621년 교서 세로]|80㎝[1621년 교서 가로]|94㎝[교지 세로]|63㎝[교지 가로]|26㎝[유서 세로]|91㎝[유서 가로]
관리자 상주박물관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669호

[정의]

조선 후기 밀양부사를 지낸 무관 정기룡이 남긴 유물.

[개설]

정기룡(鄭起龍)[1562~1622]은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밀양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하고, 이후 밀양부사 등을 지낸 무관이다. 정기룡 유물(鄭起龍遺物)정기룡이 착용하였던 요대(腰帶) 1개, 신패(信牌) 1폭, 유서(諭書) 1매, 교서(敎書) 2축, 교지(敎旨) 1매 등 5종 6점이다. 1980년 보물 제669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정기룡 유물은 대를 이어 정기룡의 후손에게 전해졌으며, 2000년대 중반까지는 경상북도 상주시 충의사(忠毅祠)에서 관리가 되었다. 2007년 상주박물관 개관 후 요대, 교서, 교지가 기탁되었으며, 2009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관리하던 신패도 상주박물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 이외에 『매헌실기(梅軒實記)』 목판 58점과 정기룡의 가족에게 내린 교지 19점 등의 유물도 함께 전한다.

[특징]

정기룡 유물 중 요대[옥대]는 길이 157㎝, 너비 4.5㎝이다. 환도나 활을 패용하기 위한 띠돈에는 문양이 투각되어 있으며, 금속 테를 둘러 혁대에 붙인 형태이다. 전면의 걸이 장식은 현재 훼손된 상태이다. 정기룡의 유물 중 요대는 1989년 겨울 도난되었다가, 1990년 일본으로 반출되기 전에 회수되었다. 당시 범인이 요대를 팔러 다닌다는 소문을 토대로 수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범인 검거로 함께 회수된 유물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미인도」이다.

명나라 도독(都督) 마귀(麻貴)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에 정기룡에게 발급하여 준 신패는 세로 55㎝, 가로 64㎝의 문서이다. 신패에는 정기룡의 공적을 높이 산 마귀가 격려의 의미와 함께 반드시 기한을 엄수하여 신패를 전달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하사받은 포상 물품도 함께 기록하고 있는데, 포상으로는 청단(靑段)과 녹견(綠絹) 각 1필(匹)과 활 1장(張), 화살 1파(杷)가 지급되었다.

2축의 교서는 각각 1617년과 1621년에 발행된 것인데, 두 교서 모두 광해군이 정기룡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하면서 발급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발행된 교지는 세로 170㎝, 가로 52㎝인데, 사륙변려문(四六駢儷文)으로 작성되어 있다. 정기룡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춘추전국시대부터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이름난 장수들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기대에 부응하는 임무 수행을 하도록 교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1621년(광해군 13) 발급한 교지는 세로 300㎝, 가로 80㎝이다. 이 교지에서 광해군은 다시 정기룡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중론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발탁을 결정한 것은 임금 자신의 뜻임을 밝히고 있다. 1617년 발행 교지와 마찬가지로 여러 고사를 인용하고 있으며, 군영의 악습을 끊어내고 엄격한 군율을 바로 세우라는 교시를 내렸다.

정기룡에게 ‘충의공(忠毅公)’ 시호를 내린 증시 교지(贈諡敎旨)는 정기룡이 죽고 150여 년이 지난 1773년(영조 49)에 발급되었는데, 세로 94㎝, 가로 63㎝이다. 보국숭록대부 행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輔國崇祿大夫 行知中樞府事 兼 五衛都捴府 都捴管) 정기룡에게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1772년 말에 조정에서 정기룡에 대한 시호 추증 논의가 이루어진 것을 영조가 수락하면서 교지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1617년(광해군 9) 3월 7일,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직을 내려 병권을 맡기면서 발급된 유서(諭書)는 세로 26㎝, 가로 91㎝이다. 1985년 10월 이후 도난당한 상태로 2022년 현재까지 회수되지 못하고 있다. 함께 도난당한 교서와 교지 각 1점씩은 1985년에 회수하였다.

한편 정기룡의 고향인 경상남도 하동군 경충사(景忠祠)에는 유품으로 교지(敎旨), 장검(長劍), 유서(諭書) 각 1점씩이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교지는 가로 80㎝, 세로 186㎝ 크기의 창호지에 ‘교지 정기룡위중훈대부수상주목사자 만력이십이년칠월초이일(敎旨 鄭起龍爲中訓大夫守尙州牧使者 萬曆二十二年七月初二日)’이라는 글이 여섯 줄 세로로 쓰여 있다. 장도는 칼집과 함께 날카로운 날을 가진 것인데, 손잡이를 포함한 길이 90㎝ 크기의 외만도(外彎刀)이다. 유서는 크기가 가로 46.5㎝, 세로 68㎝이다.

[의의와 평가]

정기룡 유물정기룡의 후손들이 정리한 『매헌실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시기에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장(名將)이었음에도 본인이 남긴 기록은 많지 않은 정기룡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을 파악하고 증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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