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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05
한자 獨立運動- 民族魂, 敎育- 搖籃 大倧敎- 天眞宮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석태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한 조선 후기 건물.

[대종교와 밀양]

밀양 영남루(密陽嶺南樓) 경내, 영남루 뒤쪽 밀양부(密陽府)의 객사(客舍) 동상헌(東上軒) 공신관(拱辰館)의 부속건물 요선관(邀仙觀)을 바꾸어 천진궁(天眞宮)이라고 한 다음, 단군(檀君)의 영정과 신위를 주향으로 하고 좌측에는 부여(扶餘), 고구려(高句麗), 가락국(駕洛國), 고려(高麗)의 시조 왕들 위패를 배향하고 우측에는 신라(新羅), 백제(百濟), 발해(渤海), 후조선(後朝鮮)의 시조 왕들 위패를 배향하여 대종교(大倧敎)의 성지이자 민족의 성지가 되었다. 공신관은 1651년(효종2) 부사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밀양 영남루 서북쪽에 객사로 건립하고, 부속건물 요선관에 전패(殿牌)를 봉안하였다. 따라서 객사 공신관의 부속건물 요선관을 천진궁으로 변경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웠지만, 단군의 위패를 봉안하는 대종교의 성지이자 민족의 성지라는 의미에 앞서, 일제강점기 이후 대종교와 밀양의 관계가 깊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대종교의 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1881~1960]이 밀양 출신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대종교가 공자교(孔子敎)와 함께 조선 멸망 이후 나라를 잃고 만주로 망명하였던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나라처럼 의지할 존재와 같은 역할을, 또 일제강점기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대종교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1898~1958]과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1901~1942] 등 밀양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의열단(義烈團)의 주요 지원 세력이었다.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이 같은 무송윤씨(茂松尹氏)로 윤세주의 족형이었다.

대종교는 북만주에 기반을 두고 북만주로 망명하거나 이주한 조선 사람들의 지원 세력이 되었고, 공자교는 남만주로 망명하거나 이주한 조선 사람들의 지원 세력이 되었다. 밀양의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1849~1941]과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 형제는 망명지인 남만주 지역의 공자교지회(孔子敎支會)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큰 힘을 쏟았다. 여러 여건 때문에 중국 남만주에 계속 망명해 있을 수 없었던 노상직은 환국 이후 자암서당 등에서 강학을 하면서 파리장서[대한민국독립청원서]에 문하 제자 13인과 함께 서명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유학의 수호와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특히 노상직의 아들 노정용(盧定容)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절친한 벗으로서 만주와 중국에서의 의열단 활동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은 노상직 후손과 밀양 고로(古老)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던 이야기이다. 노정용은 후일 김원봉과 함께 월북하였다.

노상직의 제자 농금(農今) 장인근(蔣仁根)은 1910년 망국 이후 자신의 거만의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서 대종교에 관여하는 한편, 상하이임시정부와 독립군 군자금 등을 지원하는 데 전 재산을 다 쓰고 해방 후 빈손으로 귀국하였지만, 귀국 후 밀양에서 단군숭녕회(檀君崇寧會)의 조직, 천진궁에 단군 영정과 위패의 봉안 등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밀양 고로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던 이야기이다. 밀양에서 단군숭녕회를 조직하고 1952년 이시영(李始榮)[1869~1953] 부통령과 신익희(申翼熙)[1894~1956] 국회의장 등 전국의 유명 인사들, 특히 상하이임시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유명 인사들을 초치하여 천진궁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가질 때, 유명 인사들을 초지한 사람이 장인근이었다는 사실은 밀양 고로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이처럼 대종교가 근대 일제강점기 밀양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기 때문에 밀양부 객사 공신관 부속건물 요선관을 개조하여 천진궁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한 자료로는 『단군봉안록(檀君奉安錄)』 등 일부 자료가 기록으로 남아 있고, 그 외 많은 구전 자료가 전한다.

[대종교 약사]

나철은 1863년 전라남도 보성 출신으로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쳤다.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어 1904년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오기호(吳基鎬)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해 한·일·청 삼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일본 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귀국하여 조약 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들을 주살(誅殺)하려 하였고, 이에 10년 유형(流刑)을 선고받았다. 곧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노력을 통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 체류 중 백봉(白峯)의 명을 받은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도인을 만나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받고 입교 의식도 받게 되어 교단을 조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좌절을 느낄 때마다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이 기울게 된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나철이 단군교를 선포한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인데, 중광이라 함은 새로이 창교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고 있었던 교단을 중흥하였다는 의미이다. 오기호·이기(李沂)·강석화(姜錫華)·유근(柳瑾)·정훈모(鄭薰謨) 등이 같이 활약하였던 인물들로 주로 유신회 회원이거나 호남 출신 우국지사였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된 나철은 밀계(密誡)와 오대종지(五大宗旨)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 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1910년 6월 서울에 2,748명, 지방에 1만 8791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1910년 8월 단군교라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종(倧)’이란 상고신인(上古神人), 혹은 한배님이란 뜻으로 ‘한인’·‘한웅’·‘한검’이 혼연일체되어 있는 존재를 일컫는다. 그 뒤 일제의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나철은 국외 포교로써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신리대전(神理大全)』을 1911년 1월에 간행하였다.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의 존폐 위기에 봉착하게 된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분함을 참지 못하고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자결하였다.

나철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된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본명은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긴 뒤 제2회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여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양성에 힘썼다. 1919년 2월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작성해 발표하였고, 비밀결사 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1920년 10월, 대부분의 대종교인으로 조직된 독립군은 백포종사(白圃宗師) 서일(徐一)의 지휘 아래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 등의 통솔을 받아 화룡현의 청산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1년 경신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김헌도 통분 끝에 병이 나서 1923년 단애종사(檀崖宗師) 윤세복(尹世復)에게 교통을 전수하고 사망하였다. 김헌의 업적은 대종교를 제도적으로 정립하고 대종교의 역사를 고증하여 확립시킨 데 있다. 『신단실기(神檀實記)』·『신단민사(神檀民史)』·『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 등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산출된 김헌의 저술들이다.

제3대 교주가 된 윤세복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귀국할 때까지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1926년 일본의 압력을 받은 만주 길림성장(吉林省長) 장쭤샹(張作相)에 의하여 「대종교포교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어 동·서·북 3개의 도본사가 해체되었고, 서울의 남도본사(南道本司)마저 폐쇄되었다. 이에 총본사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 6년간 피해 있다가, 1934년 발해의 옛 도읍터였던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으로 이전하고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세웠다. 대종교서적간행회를 발족시켜 『종경』·『삼일신고』·『종지강연』 등을 간행하는 한편, 천전(天殿) 건립을 서두르던 중 1942년 11월 19일 윤세복 외 25명의 간부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 구성’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윤세복은 무기형을 받았다. 10명의 간부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銕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는 고문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이를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며, 숨진 10명의 간부를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숭상하고 있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게 되자 총본사가 부활되었고, 1946년 2월 환국하여 서울에 설치되었다. 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의 일원으로 등록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의 노력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었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 받았다.

1949년 교세 회복을 위하여 대종교 중흥회가 조직되어 『역해종경사부합편』 등의 경전이 간행되었으며, 1950년 5월 도통 전수제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총전교제(總典敎制)가 채택되어 윤세복이 제1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55년 9월 제2대 총전교로 정관(鄭寬) 도형(道兄)이 임명되었고, 종단 법인체 구성을 추진하여 1957년 12월 27일자로 재단법인 설립 신청을 낸 이듬해인 1958년 4월 재단법인 대종교 유지재단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1965년 대종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어 대종학원이 부활되었으며, 1968년 종경종사편수위원회가 조직되어 종경 1만 3000부가 간행되었다. 당시 홍제동에 있던 총본사는 1982년에 홍은동으로 옮겼으며, 1982년 취임한 권태훈 제13대 총전교는 1983년 2월 27일에 중광절을 기하여 중창선언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1992년에 취임한 안호상 총전교가 1999년 봄에 사망한 뒤, 후임 총전교가 대종교 총본사를 이끌고 있다. 1997년 당시 교세는 15개 교구에 102개 교당, 342명의 교직자, 그리고 47만여 명의 신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

교단에서의 호칭은 단애종사(檀崖宗師)이다. 본명은 윤세린(尹世麟),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상원(庠元)이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한학을 공부한 다음 고향의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와 대구의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에서 5년 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1906년부터 3년 동안 대구에서 수학(數學)을 공부하였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1년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옮긴 뒤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현 당벽진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학원을 설립 또는 경영하며 5년 동안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4년 선종사(先宗師)인 무원종사(茂園宗師)[김교헌]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南關)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5년에 일본 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 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대종교 금지령은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박찬익(朴贊翊)의 외교 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 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 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 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윤세복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 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영정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다. 또한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 간행 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단군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런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교단 간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을 교단내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1946년 귀국,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 뒤 교세 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 교단 조직의 정비 강화, 단군전의 봉안, 교적 간행, 인재 양성을 위한 홍익대학의 설립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단 체제를 민주화하여 전통적인 교통 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 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현대사회에 맞는 조직 체제로 정비, 강화하여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천진궁]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단층팔작지붕 목조와가집이다. 밀양 영남루의 부속건물로서 1652년(효종 3)에 창건되었으며 공신관(栱桭館)이라 부르기도 한다.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御天大祭), 음력 10월 3일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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