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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830
한자 申命圭
영어음역 Sin Myeonggy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신상(申恦)
아우 신명륭(申命隆)
성별
생년 1618년연표보기
몰년 1688년연표보기
본관 평산(平山)
원서(元瑞)|군서(君瑞)
묵재(黙齋)|묵치(默癡)
추증 이조판서
제향 봉암서원
대표관직 암행어사|함흥판관|산릉도감낭청
주요활동/연도 1662년 진도에 유배됨연표보기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서(元瑞)·군서(君瑞), 호는 묵재(默齋)·묵치(默癡)·적안(適安). 첨정(僉正) 신목(申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이고, 아버지는 부사 신상(申恦)이며, 어머니는 이흥인(李興仁)의 딸이다. 동생으로 신명륭(申命隆)이 있고, 아들에 신유, 신임, 신심, 손자에는 신사철(申思喆), 신사영(申思永), 신사건(申思建)이 있다.

[생애]

1618년(광해군 10)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지평, 장령, 전라도 암행어사, 정언, 헌납을 거쳐 주로 대간직을 역임하였다. 1688년(숙종 14)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646년(인조 24) 식년 진사시에 급제했다.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내다가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관직이 집의에 올라 직간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1665년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지내고 이듬해인 1666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지내다가 1667년 남해로 유배되었다. 1669년 집의에 이르고, 이어 사간·부수찬 등 주로 대간을 역임하였다.

1673년(현종 14)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의 석물들이 파괴되고 봉분이 허물어져 능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 산릉도감 낭청이었던 신명규와 감조관 이정기 등이 천이(遷移)에 불복하여 신명규는 제주도의 대정(大靜)에, 이정기는 정의(旌義)에 각각 정배되었다. 숙종 초기에 들어와 신명규는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풀려났다.

그런데『진도군의 문화유적』에는 “신명규는 적거지(謫居地) 진도에서 20여 년 동안 교화와 인재양성에 공을 세워 진도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 진도의 유생 박제현(朴齊賢) 등은 “문간공 노수신(盧守愼)·문정공 이경여(李敬輿)·문충공 김수항(金壽恒)·고 참판 이민적(李敏迪)·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고 집의 신명규(申命圭)·고 판서 남이성(南二星)은 본군에 찬적(竄謫)되었으므로 사민(士民)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고 상신 충익공 조태채(趙泰采)는 위기를 무릅쓰고 대책을 찬정하였는데, 군흉(群凶)에게 무함 받아 몸이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조태채를 제사하도록 허락하시고, 이어서 은액(恩額)을 내리소서.”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렇게 볼 때 신명규의 유배지와 유배기간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진도 소재 봉암서원에 배향된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신명규가 10여 년간 제주도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잠깐 진도에 머문 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것을 계기로 삼아 제향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저술]

저서로는『묵재기문록(默齋記聞錄)』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5년(영조 1) 진도 유생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로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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