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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779
한자 金萬壽
영어음역 Kim Mansu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의병장
아버지 김대유(金大有)
어머니 오세훈(吳世勳)의 딸
아우 김천수(金千壽)|김백수(金百壽)|김구수(金九壽)
출신지 황해도 봉산군
성별
생년 1553년(명종 8)연표보기
몰년 1607년(선조 40)연표보기
본관 광산(光山)
덕로(德老)
시호 장양(莊襄)
추증 공조판서
제향 충렬사(忠烈祠)
대표관직 부호군|봉산군수|선전관|진도군수|감찰|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풍천부사(豊川府使)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개설]

1437년(세종 19) 진도 설군 이래 제90대 진도군수로 1593~1594년까지 재임하였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훈련원판관 김대유(金大有)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세훈(吳世勳)의 딸이다. 아들은 김광협이다. 아우로는 김천수(金千壽)·김백수(金百壽)·김구수(金九壽)가 있다.

[생애]

1553년(명종 8)에 태어나 1584년(선조 17)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봉산군수, 선전관, 진도군수, 감찰,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풍천부사(豊川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선조 40)에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황해도 봉산군 고향집에 있다가 세 아우 및 진사 최섭(崔涉)·이배(李胚)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900인을 모으고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세 아우를 선봉장으로 삼고, 급히 장단(長湍)으로 나가 조방장, 유극량(劉克良)과 합병해 임진강 방어전에 참가하였다. 아우 김백수가 조방장과 함께 파주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남은 두 아우와 함께 흩어진 군졸들을 모아 다시 봉산으로 돌아와 의거할 준비를 하며 아들 김광협과 함께 황해도 여러 읍의 적정을 탐문하였다.

이어 순변사 이일(李鎰)에 의해 임시로 봉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선조의 명으로 의병장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켰고, 여러 군(郡)의 군사들과 합세해 왜군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고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의병장의 호를 받았으며, 선전관에 임명되어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3전 3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때 19세의 아들 김광협을 잃었다.

1593년 진도군수가 되어 한산도와 광주(光州)에 각각 진을 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군대와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급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김만수는 진도군수 재임시 관곡(官穀, 국가의 곡식)을 훔쳐내었다는 이유로 1606년(선조 39) 사헌부에 의해 탄핵되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진도군수를 떠난 지 13년 만의 처벌이었다.

[상훈과 추모]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1708년(숙종 34)에 세워진 봉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관련기록]

조선 후기의 문신 김상정(金相定)의 『석당유고(石堂遺稿)』에 실려 있는 「김씨의열전(金氏義烈傳)」은 임진왜란 때 황해도 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만수(金萬壽)의 전기이다. 이 글에는 그의 아우 김천수·김백수·김구수와 아들 김광협 등에 대한 약전(略傳)과 당시의 전쟁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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