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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부창 옛터는 명당자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08
한자 雙阜倉-明堂-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6월 9일 - 「쌍부창 옛터는 명당자리」 김선진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6월 30일 - 「쌍부창 옛터는 명당자리」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관련 지명 쌍봉산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지도보기
채록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김상로

[정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있는 쌍봉산 아래 명당을 차지하고자 원래 있던 쌍부창을 옮기고 묘를 쓴 김상로의 이야기.

[개설]

김상로 묘의 옛터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산 24-1에 있으며, 김취로 묘의 옛터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산 24-27에 위치한다. 김상로와 형 김취로의 무덤은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산 9-3에 있는 아버지 김유 선생 묘역 아래로 2017년 6월 이장되었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쌍부창 옛터는 명당자리」라는 제목으로 357~360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쌍부창 옛터는 명당자리」는 1980년 6월 9일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김선진[남, 43세],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내용]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는 옛날에 의창(義倉)이 있었는데, 이름은 쌍부산 아래에 있다하여 쌍부창이라 하였다. 지금은 쌍부산쌍봉산이라 부른다. 영의정을 했던 김상로는 전국에서 명당자리를 찾다가 쌍부창의 자리가 명당자리임을 알았다. 김상로쌍부창의 명당자리에 묘를 쓰고 싶어 수원부사에게 창고를 이전하게 만들라고 청탁하였다. 이에 수원부사는 주민들을 시켜 창고가 부실하니 창고를 옮겨달라는 진정서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김상로는 영조대왕에게 상소가 올라간 다음날 바로 창고 이전을 시켰다. 이전한 의창은 원래 있던 위치에서 언덕 하나를 지나 옮겨졌는데, 멱우리 동네에서 마주보는 쌍봉산 밑의 자리이다. 옮긴 창을 부창이라고 하고 이 창터는 부창터라고 한다. 후에 멱우리로 다시 창터가 다시 옮겨져서 창고가 있던 멱우리 동네를 창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해창리에 있던 해창이라는 창고도 부실공사라는 핑계를 대어 헐게 만들었다. 의정부에서는 이러한 김상노의 행태를 알고 정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러 지역민들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삭탈관직을 해야 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김상노는 부인이 먼저 죽자 옛 쌍부창 터에 부인의 묘를 썼다. 그리고 죽은 후 부인 옆에 함께 합장되었다. 김상로의 형인 김취로도 쌍봉산 아래의 명당자리에 묘를 같이 썼다.

한편 기미만세사건 때 멱우리 창말에서는 삼천 명의 군중이 봉기하였다. 이때 일본인 사사카[佐板]가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가 구타하고 학살하였다. 일본인에게 마을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학살을 피해 피난을 다니느라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다. 흉작으로 기근이 들자 수원군 참사직을 지낸 새랑리[사랑리의 와음인 듯 함]의 오승현이란 사람이 멱우리 창말 창고에서 쌀을 풀어 주민들을 구제하였다.

[모티프 분석]

「쌍부창 옛터는 명당자리」에서는 명당 빼앗기 모티프가 나타난다. 작중 주인공인 조선 시대 실존 인물인 김상로는 작중에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명당자리를 탈취한다. 김상로는 명당자리에 묘를 써서 발복하고자 하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구휼구제 장소를 빼앗고자 권력 남용과 부정 청탁을 저지른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고자 부정·불법의 방법을 써서 암장(暗葬)·늑장(勒葬)·투장(偸葬) 등을 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영의정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던 김상로 또한 이러한 행위를 저질렀고 이것은 역사 기록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김상로에 의한 창고의 이전과 지역에 쓰인 높은 벼슬아치의 묘자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지역민의 기억에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덧붙여 전해진다. 한편 부정한 방법으로 쌍봉산 명당자리를 취하고 실제 묘까지 썼던 김상로와 김취로는 관직에서 삭탈·파직되고 귀양·유배를 가는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 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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