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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과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298
한자 - 科擧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10월 4일 - 「벼락과거」 안익승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9월 30일 - 「벼락과거」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채록지 경기도 수원시 교동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정조|시골 선비

[정의]

경기도 화성시의 옛 안녕리 사람이 미복잠행을 하던 정조를 만나 문답을 나눈 후 과거에 급제하게 된 이야기.

[개설]

「벼락과거」융릉용주사 근처 마을을 미복잠행 하던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뒤주대왕 애기능이라고 높여 말해 준 안녕리 사람의 답변이 흡족하여 과거에 급제시켜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9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벼락과거[간촌 이생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58~63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벼락과거」 이야기는 1980년 10월 4일 경기도 수원시 교동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안익승[남, 62세]이며 조사자는 성기열, 김용범이다. 「벼락과거」는 수원시에서 수집되었으나 이야기 속의 배경과 등장인물은 융건릉용주사가 있는 화성의 옛 안녕리 지역[현재 융건릉화성시 안녕동, 용주사화성시 송산동에 있으며, 법정동으로는 화성시 화산동에 포함됨]을 바탕으로 한다. 58쪽부터 61쪽 상단까지는 ‘벼락과거’에 대한 내용이고, 61쪽부터 63쪽까지는 정조의 잦은 능행차로 인한 능참봉의 고생담 및 우천 시 정조가 몰래 능참봉 감시 감독을 보냈을 때 조력자의 조언을 듣고 위기를 면한 능참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용]

정조대왕이 아버지[사도세자, 1735~1762, 영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이선(李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그 무덤을 옛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화성의 화산 아래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쳐 불렀다. 정조는 아버지를 장헌세자 이상으로 더 높이 추존하고자 하였으나 선왕의 유지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는 안타까운 마음에 미복(微服) 차림으로 아버지 능을 찾은 뒤 근처 마을[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일대]을 돌아보게 되었다. 정조는 임금인 것을 속이고서 밭에서 일하는 한 남자에게 말을 걸고 담배를 같이 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정조가 “저 위 저곳은 어떤 곳이오?”하고 아버지 산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가 답하길 “당신 차림새를 보아하니 선비가 틀림이 없는데 어찌 저곳을 모르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기에 그것도 모르고 여기를 다녀가오? 그냥 지나가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이에 정조는 짐짓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네. 저곳은 뭐 하는 곳이오?”하며 시치미를 떼고서 물었다. 남자는 “저곳은 뒤주 대왕 애기능이오. 왕으로 추존이 안 되어 나라에서는 장헌세자의 현륭원이라 하오. 비록 정식 임금은 아니지만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뒤주 대왕의 애기능이라 부르오.”이라고 일러주었다. 아버지의 추존을 반대하던 신하들과 달리 세자에서 대왕으로 높이고, 산소를 능이라 불러준 일개 촌부의 답변에 정조는 흡족해졌다. 그리하여 남자에게 “글공부는 좀 했느냐?”고 물었고, 남자는 “글공부는 했지만은 과거에는 매번 낙방이라오.”하며 답했다. 정조가 “저기에 과거 방문이 붙었습디다.”라고 하자, 남자는 못 봤다고 하였는데, 정조 다시금 “여기 오는 길에 막 방이 붙는 걸 봤소. 이번 과거는 꼭 가서 보시오. 꼭.”이라고 하며 과거를 권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정조는 환궁하자마자 과거 방문을 급하게 붙였다. 안녕리 남자는 과거를 보러 갔는데, 과거 글제가 ‘어느 간촌 이생원과 어느 선비가 나눈 대화 내용을 쓰라.’는 식으로 나왔다. 남자는 지난번 자신이 나눈 대화 내용을 답안으로 써냈고 결국 급제하게 되었다. 이를 간촌 이생원의 벼락과거라고 한다.

[모티프 분석]

「벼락과거」 이야기는 정조가 아버지 묘소 인근 마을에서 시골 선비를 만나는 모티프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임금이 평민인 척 변장을 하고서 민가를 암행하며 백성을 속이는 모티프가 포함되어 있다. 이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서 질문하는 왕의 속임과 상대방이 정조대왕인지 모르고 솔직하게 대답한 시골 사람의 속음은 질문자와 응답자의 상대성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여기서 속고 속이는 것은 왕의 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왕의 물음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덤을 백성들은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 싶었던 정조대왕의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이 물음 속에는 아버지와 자신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정조의 인정 욕구와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역모와 비행 등을 사유로 폐위를 당하고 결국 뒤주에 갇혀 죽은 비참한 사도세자이기에 왕으로 추존이 어렵고, 이로써 정조는 부정한 죄인의 아들이 된다. 그렇기에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의 왕위 정통성에 위험이 되는 불완전 요소가 된다. 그런데 시골 선비는 ‘뒤주 대왕의 애기능’이라는 대답으로 사도세자와 묘소의 지위를 ‘대왕’과 ‘능’으로 격상하였고, 이를 들은 정조는 인정 욕구를 충족하고 흡족해한다. 이때 ‘뒤주대왕 애기능’이라는 시골 선비의 대답은 비록 국가 조정의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에 결부된 불완전 요소였던 ‘왕’과 ‘릉’을 모두 충족하는 명명이 된다. 그리하여 ‘뒤주대왕의 애기능’이라는 호명을 통해 왕위 정통성의 인정과 심리적 안정감을 경험한 정조는 이에 대한 보은적 행위로서 시골 선비만 알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글제를 내어 과거 급제를 선물로 하사한 것이다. 그런데 ‘뒤주대왕의 애기능’은 다만 시골 선비 한 개인만의 호명이 아니다. ‘뒤주대왕’은 융릉이 위치한 안녕리와 그 인근의 마을의 민중들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일컫던 지역적 칭호이기에 시골 선비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것이다. 그렇기에 간촌 이생원의 벼락과거는 사도세자와 정조에 대한 융릉 인근의 지역적 인식에 대해 정조가 고맙게 여긴다는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벼락과거」는 민중의 입장에서 전해지는 구비 설화이자 허구의 이야기이다. 즉 설화의 화자이자 향유자인 민중이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과 안타까움에 지역 암행 사찰이라는 모티프를 더하여 민심과 세평에 귀 기울이는 정조대왕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 또한 정조대왕의 물음 및 예상 답안의 핵심이 사도세자와 묘소의 지위 인식이라는 점에서 죽임당한 아버지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정조의 심리적 불안감을 설화 전승집단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글공부를 하였지만 매번 과거에 낙방하여 농사일을 하던 이생원이라는 익명의 인물은 안녕리 지역의 보통 평민 혹은 평범한 시골 선비를 표상한다. 이에 간촌 이생원이 정조대왕으로부터 얻은 벼락과거 급제는 사도세자 묘소 천장에 대한 지역민의 호의적인 인식과 타 지역 대비 선민의식적인 지역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참고문헌]
  • 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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