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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68
한자 洪暹
이칭/별칭 퇴지(退之),인재(忍齋),경헌(景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윤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4년연표보기 - 홍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28년 - 홍섬 사마시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29년 - 홍섬 정시에 장원
활동 시기/일시 1535년 - 홍섬 흥양현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49년 - 홍섬 친상을 당함
활동 시기/일시 1552년 - 홍섬 청백리(淸白吏)에 선발
활동 시기/일시 1559년 - 홍섬 예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3년 - 홍섬 예문관·홍문관 대제학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4년 - 홍섬 좌찬성(左贊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홍섬 우의정 임명, 곧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68년 - 홍섬 총재관으로 『명종실록』 수찬
활동 시기/일시 1571년 - 홍섬 좌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3년 - 홍섬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으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홍섬 남양홍씨 『병자보(丙子譜)』 편찬
몰년 시기/일시 1585년연표보기 - 홍섬 사망
사당|배향지 안곡서원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로 860-36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남양(南陽)
대표 관직 홍문관 대제학|영의정

[정의]

경기도 화성시를 세거지로 하는 남양 홍씨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엮임한 홍귀해(洪貴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부승지(右副承旨) 홍형(洪泂), 아버지는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송일(宋軼)의 딸이다. 첫 부인은 진산군(晉山君) 유홍(柳泓)의 딸이며, 계실(繼室)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5대손인 한자(韓慈)의 딸이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아들로 선조(宣祖)의 형인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홍섬(洪暹)[1504~1585]은 1504년(연산군 10)에 태어났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29년(중종 24)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하여 1531년(중종 26)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였다. 겨울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뽑히고, 다시 박사(博士)로 전직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1534년(중종 29) 부수찬(副修撰), 지제교 겸 사서(知製敎兼司書)를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현(興陽縣)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원분가(寃憤歌)」를 지었다. 이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경기도관찰사·예조참판을 거쳤다. 1549년(명종 4) 친상(親喪)을 당하였다가 복제(服制)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전직하였다. 1552년(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었다.

1557년(명종 12)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예조판서·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직하였고, 이조판서,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1559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1560년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하였다.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정무를 처결하고 곧이어 우의정에 올랐으나, 남곤(南袞)의 죄상을 탄핵하다 또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 총재관(總裁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수찬하였다.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었고, 1573년(선조 6)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 번이나 중임하였다. 1576년(선조 9) 선대인 홍식(洪湜)이 가계(家系)를 기록한 소첩(小帖)에 선대 묘소와 묘표 등을 근거로 작성한 가계를 더하여 남양 홍씨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를 『병자보(丙子譜)』라 하는데, 현재 목판은 없어지고 인본(印本)과 모사본(模寫本)만 남아있다.

1579년(선조 12) 병으로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다는 평을 들었다.

[학문과 저술]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며,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인재집(忍齋集)』이 있으며, 1553년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중신기(景福宮重新記)』를 남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생전에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죽은 후 고향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법성리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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