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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애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59
한자 廉瓊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윤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100년연표보기 - 염경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124년 - 염경애 최루백과 혼인
몰년 시기/일시 1146년연표보기 - 염경애 사망
성격 귀족
성별
본관 봉성(峯城)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고려 전기 한림학사를 지낸 최루백의 아내.

[가계]

염경애의 본관은 봉성(峯城). 아버지는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이고, 어머니는 추밀원우승선 급사중(樞密院右承宣給事中) 심후(沈侯)의 딸인 의령군 대부인(宜寧郡大夫人) 심지의(沈志義)이다. 남자 형제는 순주(順州)의 수령을 지낸 염순로(廉純老), 태학생(大學生)인 염행약(廉行若), 진사시에 합격하고 평주(平州)의 수령을 지낸 염충약(廉忠若)과 역시 진사시에 합격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염신약(廉信若)이 있다. 여동생으로 주부(注簿) 이자득(李自得)과 혼인한 염정애(廉貞愛)가 있다.

[활동 사항]

염경애(廉瓊愛)[1100~1146]는 1100년(숙종 5) 개성에서 태어나, 25세인 1124년(인종 2)에 수원 향리 출신 최루백(崔婁伯)과 혼인하였다. 「염경애 묘지명」에 의하면 한문을 읽을 줄 알았으며, 유교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 최루백이 한직을 떠돌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도리를 힘써 행하여 어렵게 생활을 끌고 나갔다. 시어머니를 효(孝)로써 봉양하였고, 내외 친척의 길하고 흉한 경조사에 모두 그 마음을 다하였다. 혼인 전에 호환(虎患)으로 죽은 시아버지 최상저(崔尙翥)를 생전에 섬기지는 못하였으나, 명절·삼복·납향[歲時伏臘]이면 매번 몸소 제사를 올렸고, 아울러 일찍이 스스로 길쌈하고 조금씩 모아서 직접 저고리 하나, 혹은 바지 하나를 지어 제삿날에 이를 때마다 바쳐 효를 다했다고 한다. 또 패주(貝州)나 중원(中原) 같은 멀고 외진 임지로 가는 남편 최루백을 기꺼이 따라갔다고 한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예빈주부(禮賓注簿) 최단인(崔端仁)[또는 최돈인(崔敦仁)]이고, 2남은 녹사(錄事) 최단의(崔端義)이며, 3남은 최단례(崔端禮)[또는 최돈례(崔敦禮)]로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다. 4남은 최단지(崔端智)[또는 최돈지(崔敦智)]인데,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장녀는 최귀강(崔貴姜)으로 흥위위녹사(興威衛錄事) 최국보(崔國輔)에게 시집갔고, 2녀는 최순강(崔順姜)이다.

[묘소]

국립중앙박물관에 「최루백 처 염경애 묘지명(崔婁伯妻廉瓊愛墓誌銘)」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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