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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62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왜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기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8년 12월 16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전
전개 시기/일시 1592년 7월 - 용인전투에서 조선군 패배
전개 시기/일시 1593년 1월 - 독산성전투에서 조선군 승리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이광|윤선각|김수|권율|와키자카 야스하루|우키타 히데이에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벌어진 일본과의 전쟁이다. 보통 1차 전쟁이 일어난 1592년의 간지를 따서 임진왜란이라고 총칭하며, 일본의 2차 침입만을 따로 지칭하는 경우에는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에 화성·수원 지역은 남양도호부수원도호부가 관할하였는데, 도성 외곽을 수호하는 주요한 요충지였다. 호서·호남 방면과 한강 이북을 잇는 육상 교통의 길목이었으며, 서해에서 하천을 통해 한양으로 진입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화성·수원 지역 일대에 한양을 수복하려는 근왕병과 의병들이 결집하였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역사적 배경]



[경과]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진군하였고, 5월 3일 수도 한양에 입성하였다. 한양이 점령당하자 조정은 도성을 수복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근왕군(勤王軍)을 모집하였다. 이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1541~1607],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1543~1611], 경상도관찰사 김수(金晬)[1547~1615] 등이 삼남 지방의 근왕병 5만여 명을 모아 북상하였다. 이들 근왕군은 우선 수원으로 진격하여 남도 지방과 수도 사이의 통로를 확보하고, 이후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용인 지역에는 일본군 600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근왕군은 용인 지역의 일본군을 먼저 섬멸하고 한강으로 북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양에 주둔하던 일본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가 본대 1,000명을 이끌고 지원에 나서면서 용인전투는 조선군의 대패로 끝이 났다. 용인전투 패배 후 근왕병은 삼남 지방으로 흩어졌고, 도성 수복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후 1592년 12월,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율(權慄)[1537~1599]이 한양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가 군사 4,000여 명을 이끌고 독산성[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2~1655]가 2만여 명의 병력을 급파하여 독산성을 포위하였다. 5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조선군은 농성전을 위주로 하면서 기습전을 감행하여 많은 적군을 베었다. 결국 일본군은 독산성 공략에 실패하고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결과]

독산성전투가 종료된 후, 1593년 2월 권율은 독산성에서 행주산성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독산성을 남한산성 등과 함께 호남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인식하고, 독산성 성곽의 개수와 비축곡의 증량, 독산성 거주민의 부역 면제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의의와 평가]

독산성전투의 승리로 조선은 화성·수원 지역에서 행주산성으로 이어지는 경기도 서남부 지역 육로를 확보하였으며, 나아가 한양의 일본군을 압박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독산성전투에 이어 1593년 2월 12일 행주대첩이 벌어졌는데, 행주대첩 승리는 독산성전투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경험과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낸 결과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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