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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42
한자 高麗 時代
영어공식명칭 History of the Goryeo Dynasty in Hwaseong-S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창훈

[정의]

고려 왕조가 존속한 918년부터 1392년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의 역사.

[개설]

남양만을 끼고 있는 경기도 화성 지역은 고대 사회 이래로 서해안 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려 시대에는중국과의 교역 통로로서의 기능도 있었지만,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漕運)의 중요 통로였고, 수시로 자행된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한 방어 거점이기도 하였다.

[남양부의 변천과 역할]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는 삼국 시대에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차지하며 당성군(唐城郡)으로 불리웠으며, 남북국 시대에는 신라 경덕왕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되었으나, 고려 시대에 들어 다시 당성군으로 복구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당성군의 연혁과 관할 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당성군은 본래 고구려의 당성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 당은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옛 이름으로 복구하였다. 현종 9년[1018]에 수주(水州)의 속군(屬郡)이 되었으며, 뒤에 [인주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16년[1290]에 홍다구(洪茶丘)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또 승격하여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가 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다시 승격하여 익주목(益州牧)이 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도태(淘汰)시키면서, 강등되어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대부도(大部島), 소우도(小牛島), 선감미도(仙甘彌島), 영흥도(靈興島), 소물도(召勿島), 승황도(承黃島), 인물도(仁物島), 이칙도(伊則島), 잡량곶도(雜良串島), 사야곶도(沙也串島), 난지도(難知島), 목력도(木力島)가 있다.”

원래 수주에 속하였다가 지금의 인천광역시에 해당하는 인주로 소속을 변경하였다는 것은 당성군의 역할이 해안 방어와 관리에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강녕도호부나 익주목으로의 승격도 군사적 역할을 부여한 것이었다. 고려 말 목을 혁파할 때 남양부가 된 이래, 남양이란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양부 관할로 명시된 대부도 이하 섬들도 남양부의 역할이 바닷길과 해안의 방어 및 관리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주의 연혁과 위상]

수주는 지금의 화성시 봉담읍 지역이 읍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고려사』 지리지는 다음과 같이 연혁을 전하고 있다. “수주는 본래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으로,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으로 고쳤다. 태조가 남쪽 지역을 정벌할 때 고을 사람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백여 명이 귀순하여 힘을 다하니, 그 공을 감안하여 승격시켜 수주가 되었다. 성종 14년[995]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 목종 8년[1005]에 [도단련사를] 없앴다. 현종 9년[1018]에 지주사(知州事)로 회복시켰다. 원종 12년[1271)]에 착량(窄梁)을 방어하던 몽고 병사가 대부도(大部島)에 들어와 거주민들을 침략하자, 섬사람들이 분개하여 몽고 병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부사(副使) 안열(安悅)이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므로, 그 공을 감안하여 승격시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가 되었다. 뒤에 또 승격시켜 수주목(水州牧)이 되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들을 도태시키면서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홍건적[紅賊]이 선봉군을 보내 양광도(楊廣道)의 각 고을에 항복을 권유하자 수원부에서 가장 먼저 적들을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므로, 마침내 군(郡)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들이 재신(宰臣) 김용(金鏞)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다시 부(府)가 되었다. 별호(別號)는 한남(漢南)이며, 또 수성(隋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주는 고구려 매홀군, 신라 수성군을 거쳐 고려 태조 때에 지역민의 귀순을 계기로 수주로 편제되었다. 원의 간섭이 시작된 후, 몽골군의 침탈을 견디지 못한 대부도민의 반란을 진압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수원도호부가 되었다. 이후 남양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 승격되었다가 목의 혁파와 함께 수원부가 되었다. 고려 말에는 홍건적에게 재빨리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부에서 군으로 강등되었다가, 권력자였던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써서 다시 승격된 일도 있었다.

수주에는 안산현(安山縣), 영신현(永新縣), 쌍부현(雙阜縣), 용성현(龍城縣), 정송현(貞松縣), 진위현(振威縣), 양성현(陽城縣) 등 7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평택시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사정을 전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안산[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진위[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양성[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서부 지역]이 수원도호부의 속현에서 빠지고 광덕(廣德)[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이 새로 포함되었다. 고려 수주의 관할 범위가 조선 시대에 비해 더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수주가 경기도 남부권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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