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사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1797
한자 乘槎錄
영어공식명칭 Seungsarok
이칭/별칭 강해승사록(江海乘槎錄)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818년 - 저술
편찬 시기/일시 1917년 -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17년 - 간행
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영남대학교
성격 표류기행문
저자 최두찬
간행자 최지영
권책 3권 1책
행자 14행 24~30자
규격 25.1x23.1㎝

[정의]

19세기 자인 출신 선비 최두찬이 남긴 중국 표류기행문.

[개설]

『승사록』은 최두찬이 1818년(순조 18) 제주도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중국을 체험하고 쓴 표류기행문이다. 『승사(乘槎)』라는 제목은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 은하수에 갔던 전설적인 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에 비의해 붙인 것이다.

[저자]

최두찬의 자는 응칠(應七). 호는 강해산인(江海散人). 본관은 영천. 최문병의 7대손으로 1779년(정조 3)에 자인현 상대리에서 부친 최휘(崔彙)와 함평 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영천최씨대동보』에 최두찬의 증조부 최옥(崔鈺)이 상대리 삼성산(三聖山) 아래 두와(斗窩)라는 서실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엿보아 아마 그시기에 원당리에서 상대리로 이거 또는 왕래했던 것 같다.

최두찬의 초년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특기할 만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행을 언급할 수 있다. 최두찬은 13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임종 때 손가락을 베어서 그 피로 소생시키려고 노력했고, 기대와 달리 돌아가시자 예의법도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렀다. 이 일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최두찬을 효동(孝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1811년(순조 11) 아버지 상에는 3년 시묘살이를 행했다.

1817년 5월 제주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중국 영파부에 표류했고, 그때의 경험을 『승사록』이라는 이름의 표류기행문을 남겼다. 최두찬은 강남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을 지닌 강남정(江南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여생을 보내다가 1821년 9월 16일 원당리 집에서 43년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마쳤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편찬/간행 경위]

『승사록』은 1917년 최두찬의 증손 최지영(崔址永)이 3권 1책으로 간행하였고,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비롯해 5종이 현전한다.

[형태/서지]

3권 1책으로 구성된 『승사록』은 25.1x23.1㎝ 크기로 한 면은 14행 24~30자로 되어 있다. 개항기 경주 출신 유학자 서정옥(徐廷玉)[선산 유학자 허훈(許薰)]이 쓴 서문과 중국인 심기잠(沈起潛)이 쓴 서문 및 목록이 있고, 책의 말미에는 최지영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시문이 실려 있다. 시는 저자가 제주도에서 지은 「제주록(濟州錄)」과 표류 중에 짓거나 표착 직후에 지은 자작시 및 중국인들과 창수(唱酬)한 작품을 모은 「정해록(定海錄)」, 「절강록(浙江錄)」, 「산동록(山東錄)」, 「연경록(燕京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은 「주중고천문(舟中告天文)」 등 4편을 싣고 있다.

권2는 일기와 추록(追錄) 및 부록(附錄)으로 되어 있다. 일기는 1818년(순조 18) 4월 8일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제주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 나주로 돌아오다가 표류하여 중국의 북경을 거쳐 귀국하기까지의 표해 기록이다. 다음 추록에는 저자의 견문 중에서 중국의 풍속 문물에 관하여 실려(室廬)·의복·가색(稼穡)·분묘(墳墓)·주거(舟車) 등으로 나누어 설(說)한 것과 「임별증양지회설(臨別贈梁知會說)」 및 중국인 허롱(許礱)이 쓴 「근서승사록후(謹書乘槎錄後)」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은 저자의 증손인 최지영이 지은 「유사(遺事)」와 한말 대학자이자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를 묶은 것이다.

[구성/내용]

『승사록』은 크게 출범·표류·귀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최두찬은 1817년 5월 대정현감(大靜縣監)에 부임한 장인 김인택(金仁澤)의 요청으로 대정현에 가서 1년 동안 제주도를 두루 살펴보다가 나주로 출육하던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50인과 함께 16일 동안 바다에 표류하다가 다행히 어선을 만나 중국 영파부 정해현에 표착하고 이후 관원의 보호를 받으면서 고국으로 환국했다. 그 체송(遞送)과정에서 『승사록』이라는 기행기를 썼으며, 중국 문사들과의 교유한 수창시(酬唱詩), 환국 과정에서 경험들을 담았다. 이 기록은 봉황성을 지나 의주와 120여리 떨어진 책문(柵門)에 도착한 10월 2일에 마치고 있다.

최두찬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특히 강남 지역 물산의 풍부함과 건물 및 성지의 웅대함,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표현했다. 중국의 다른 곳에 비해 체류기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승사록』에는 강남에 대한 기록이 전체 분량의 3분의 2가 넘는다. 필담창화(筆談唱和)를 나눈 중국문사 대다수도 이 지역인사들이다. 이외에도 중국 강남의 풍속과 산천명승, 중국 선비와의 수창, 필담 문답, 가옥·의복·농사·무덤·배와 선박 등을 다방면에서 기록을 하였다.

반대로 하북(河北) 지방은 땅이 매우 척박하고 백성들은 곤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산동에서 고려지(高麗紙)를 접하고 그 감흥을 자신이 강남에서 썼던 종이보다 훨씬 재질 우수한 사실과 중국과 일본에 천금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시로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승사록』은 다른 표해록 작품에 비해 낯설고 신비로운 정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내었을 뿐 아니라 국적을 초월해 지식인들의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참고 문헌]

『승사록(乘槎錄)』 『승사록, 조선 선비의 중국 강남 표류기』 (휴머니스트, 2011)『강해승사록』(신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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