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돌의 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1198
이칭/별칭 불굴사 돌거북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4년 - 「거북돌의 눈」 한기수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6년 - 「거북돌의 눈」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5년 - 「거북돌의 눈」 「불굴사 돌거북」이라는 제목으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9년 - 「거북돌의 눈」 「불굴사 돌거북」이라는 제목으로 『경산문화대사전』에 수록
관련 지명 불굴사/돌거북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불굴사길 205[강학리 8]지도보기
채록지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지도보기
성격 지명 유래 전설
주요 등장 인물 불굴사 주지승|나그네[걸승]
모티프 유형 손님을 끊으려다 망한 절[폐사]|명당 파손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에 있는 불굴사와 돌거북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거북돌의 눈」불굴사(佛窟寺)라는 절의 번성과 쇠락을 거북돌의 존재와 훼손으로 설명하는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경산대학교 부설 경산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문화유적총람』에 「거북돌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채록 시기와 채록 장소가 명확하지 않다. 2005년 대구대학교 부설 인문과학연구소에서 간행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 「불굴사 돌거북」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1984년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한기수[남, 당시 38세]에게 채록한 것이다. 이는 2009년 경산시립박물관에서 간행한 『경산문화대사전』에 같은 제목으로 인용되어 있다.

[내용]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안골에 불굴사가 있다. 불굴사는 신라 때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물레방아가 8대나 갖추어질 정도로 번창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가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지나가는 과객들은 절에 와서 괜히 스님을 업신여기고 “밥 해 달라”, “뭐 해 달라” 하며 큰소리를 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조금만 잘못 대접하면 스님을 때리는 등 행패가 말이 아니었다. 사찰이 큰 만큼 손님들도 늘어나 주지스님으로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지스님이 손님이 적게 오는 비방을 찾자, 절을 찾아온 한 걸승이 “산 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 돌이 있는데 그 거북의 눈을 빼버리면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불굴사 스님들은 행패를 부리는 길손 때문에 워낙 지쳐 있었으므로 좋아하며 거북의 눈을 빼버렸다. 그러자 청천 하늘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한 달 동안 큰 비가 오더니 이 골, 저 골마다 산사태가 나서 절이 흙 속에 다 묻혀 버렸다. 암자고 절이고 다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이런 까닭으로 미륵상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고, 이 절의 말사였던 은해사(銀海寺)는 큰 절이 되고 불굴사는 은해사의 말사가 되어 버렸다. 이로써 사찰은 재기하지 못하고 있다가 조선 영조 때 송광사의 한 노승이 현몽을 받고 이곳에 와 일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거북돌의 눈」의 주요 모티프는 ‘손님을 끊으려다 망한 절’과 ‘명당 파손’이다. 손님 대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는 ‘접빈객봉제사’라 하여 빈객을 대접하는 것은 제사를 모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손님 대접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피해서는 안 되며 최선을 다해야 하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오는 손님을 정성을 다해 대접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주변의 자연물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담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손님을 치르기 싫어하다가 자연물을 훼손하고 몰락한다는 설화로는 「내동 오씨 부자의 몰락」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