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산 봉수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521
한자 匙山 烽燧-
영어공식명칭 Sisan' Fire Signal Remain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산60-1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장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4년 - 시산 봉수대 운영 중단 추정
소재지 시산 봉수터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산60-1 지도보기
성격 봉수터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터.

[개설]

시산 봉수터는 조선 시대 봉수 유적이다. 봉수 제도는 횃불과 연기로 국경 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던 일종의 통신 제도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 것으로, 역마나 인편보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전근대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봉수가 행해진 것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후기다. 조선의 봉수제는 고려의 제도를 토대로 정비되었으며, 신속성을 바탕으로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이나 국경 상황을 상급 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하였다. 즉,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 기능을 목적으로 설치 활용된 통신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봉수제는 파발·역참 제도와 병행되면서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 현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전환하였다.

조선 시대 문헌상 경산 지역에 설치된 봉수는 경산현의 성산봉수(城山烽燧)[대구광역시 수성구 소재]와 하양현시산봉수(匙山烽燧) 2곳뿐이다. 이외에 대왕산 봉수터덕천리 봉수터가 현재 경산시 행정 구역 안에 있지만, 문헌상 확인되지는 않는다.

[변천]

시산 봉수가 설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경상도지리지』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에는 이미 설치되어 운영하고 있었다. 하양현 읍치 서쪽 5리에 있으며, 동으로 영천군 성황당봉수(城隍堂烽燧), 남으로 경산현 성산봉화(城山烽火)에 응한다. 조선 시대 간행된 읍지류에 계속해서 수록된 것으로 보아, 1894년에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시산 봉수터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 산60-1에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효성캠퍼스 기숙사 앞에 있는 해발 91.5m 산 정상이다. 장군산에서 뻗어 나온 구릉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금호강이 흐른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시산 봉수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현황]

시산 봉수터는 현재 봉수대 흔적만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시산 봉수터는 조선 시대의 봉수터로, 대구-경산-영천 지역을 잇는 봉수 중 하나이다. 국방상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