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12
한자 -記憶1950年慶山-鑛山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경희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소재 코발트 광산에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

[개설]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은 1950년 6·25 전쟁 직후 군경에 의해 저질러진 한국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며, 현재도 학살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역사의 현장이다.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은 1960년에 와서야 잠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가 5·16쿠데타 이후 다시 묻혀버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2009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363구의 유해를 발굴한 뒤 2009년 11월 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으며 대법원에 의해 학살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도 인정받았다.

[평산동 코발트 광산을 가 보셨나요?]

대구 스타디움에서 경산시 남쪽을 관통하는 삼성현로 6차선 도로를 따라 남산면을 향해 달리다 보면 멋진 카페와 전원주택들이 길 양쪽에 늘어선 경산시 사동 일대를 지나고 곧이어 ‘인터불고 CC’, ‘샤갈의 마을’, ‘경산 코발트 광산’이라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 바로 앞에는 27홀 규모의 회원제 골프장인 인터불고 CC와 고급 전원주택 단지인 샤갈의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들 건축물 아래쪽으로 좁은 우회전 길이 나 있다. 우회전 길을 따라 500m 남짓 들어가노라면 도움 요양병원 건물과 간판이 언덕 위에 버티고 서 있고, 병원 올라가는 길 아래쪽으로 ‘경산 코발트 광산 주차장’ 표지가 보일 듯 말 듯 서 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오십 미터 남짓 더 들어가 보면 수평갱도 위쪽에 시멘트를 깔아 주차장을 조성해 두고, 산 아래 막다른 지점에 경산 코발트 광산 피학살자 유족회 임시 사무실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아버지!!! 1950, 경인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란 플래카드와 함께.

이런 비장한 각오가 부담스러웠을까? 2020년 9월까지만 해도 파티마 요양 재활병원으로 영업하던 것이 불과 한 달 사이에 도움 요양병원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코발트 광산은 이 재활병원이 서 있는 산 아래에 수직굴과 수평굴을 뚫어 1937년 6월부터 금은 광산으로 영업해 오다가 1942년 코발트 광맥이 발견됨으로써 채광, 선광, 제련 시설을 갖춘 조선 최초의 코발트 광산으로 개발된 곳이다. 하지만 광산 주인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자 그대로 도망쳐 버림으로써 갱도도 정리되지 않은 채 흉물로 전락해 버렸다.

[갱도에 묻혀버린 보도연맹 사람들]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일제의 지하자원 수탈 정책에 의해 태어났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에게 포신이나 비행기에 사용되는 합금의 원료인 코발트는 무엇보다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평산동 코발트 광산은 이런 코발트가 매장된 곳이었다. 일명 ‘보국(報國) 광산’으로도 일컬어지던 광산은 한때 주변에 300여 호에 이르는 민가가 들어서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다. 그래서 주변에 점촌(店村)이 형성되었고, 이 지명은 지금도 남아 옛 영화를 전한다. 그렇지만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게 되면서 이들은 거미줄처럼 뚫린 갱도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달아났다. 평산동 광산촌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주민들은 연명하기 위해 폐광산의 쓸만한 물건들을 모두 들어냈다. 광석을 실어나르기 위한 승강구 역할을 하던 수직굴도 속이 텅 비게 되었다. 입구가 가로 1.7m, 세로 4m에 이르는 제1 수직굴은 깊이만도 150여m에 이르고 20m 위에 위치한 제2 수직굴도 깊이가 족히 40m는 넘는다. 그런데 이렇게 버려졌던 갱도가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3,500 명이 매장되는 학살의 현장이 될 줄이야!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사건은 6·25전쟁 직후 군인과 경찰 등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남한 최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사건이며 현재도 학살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역사의 현장이다. 학살사건은 1950년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 지하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발생하였다. 희생자는 당시 경산군과 청도군 지역 보도 연맹원 1,000명[경산 400명, 청도 400명, 기타 영천과 대구 지역 200명 추산]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2,500명 등 총 3,500명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 연맹원들은 통상적으로 실시하던 교육을 명분으로 지서나 경찰서, 학교 등지에 소집[예비검속]되어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은 군경에 인계된 후 군용트럭에 태워져 이곳까지 끌려와 처형되었다. 당시 부근에 살았던 주민들은 “하루에 군용트럭 10여 대씩, 한 달간 계속 실려 왔으며, 트럭이 지나가고 몇 시간 후에는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평산동 쪽에서 들려 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 5월 22일 대구 매일신문 강창덕 기자의 “아직도 첩첩이 쌓인 백골-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학살 사건”보도 덕분이었다. 그는 이 기사에서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수많은 유골을 볼 수 있었다.”고 기록해 두었다. 또 당시 경북유족회 조사부장 이복녕 전 대구유족회장은 “수직 1굴에서 수많은 유골을 확인했다고 증언한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경산·청도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직후 정기 소집 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예비검속을 당해 각 지서나 경찰서 유치장, 수리조합 창고 등에 수감되어 있다가 7월 초부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갔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인민위원회에 가입하거나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이 지역 빨치산들에게 마지 못해 밥을 해 주거나 이들을 숨겨준 소극적 부역 혐의자들이었다. 산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 경산군[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이나 남천면, 청도군 매전면이나 이서면 등지의 피해자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는 일제의 징용에서 살아남았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해 희생당한 사람, 일제나 해방 정국에서 좌익혐의로 이미 형기를 마치고 나왔으나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죄를 사해 준다는 꾐에 빠져 도장을 찍어줬다가 희생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대구교도소 수감자들은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포고령 2호 위반 등 정치범들이었으며 제주 4·3항쟁에 연루됐거나 방화나 살인 등 일반 수형자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기결수보다는 미결수가 훨씬 많았다. 2003년 국민일보는 당시 대구교도소에서 부산교도소로 이감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재소자가 2,574명이라고 밝혔고. 1960년 6월 매일신문은 1,402명의 수감자 명단을 확인한 바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코발트 광산에서 희생된 것으로 짐작된다. 제4대 국회가 접수한 경산·청도 지역 희생자 수가 800명에 이르는 것을 볼 때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3,500명이라는 것은 결코 과장된 숫자가 아니다.

[66년 만에 끌어낸 국가 책임 인정]

경산군에서 코발트 광산 민간인학살에 대한 최초의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60년 4·19혁명 직후이다. 이 사건에 대해 대구 매일신문이 5월 22일 최초 보도를 함으로써 촉발된 진상규명 운동은 6월 1일 ‘경산군 피학살자실태조사회’ 결성으로 이어졌고 6월 15일 대구상공회의 소회의실에서 경북유족회[회장 이원식]를 결성, 곧바로 경산유족회 결성으로 진행되었다. 경북유족회는 7월 28일 경북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거행했으며 경산유족회는 8월 7일 중앙초등학교에서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그리고 8월 11일 선산지구 발굴, 8월 13일 경산 코발트 광산 현장 발굴, 8월 15일 가창댐 주변 발굴 및 대구지구 피학살자 합동 묘 조성, 9월 4일 영덕지구 합동위령제 거행, 10월 20일 경북유족회를 중심으로 한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족 수는 경상북도 22만 명, 경상남도 22만 명, 전라남도 21만 명 등 총 114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5·16쿠데타 후 군사정부는 ‘법률 제633호 특수범죄의 처벌에 관한 법’을 제정했고, 공포한 날로부터 3년 6개월까지 소급해 유족회 간부들에게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유족회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피학살자 조사명부, 유골발굴일지, 유골 상자 등이 압수·폐기되었고 위령탑과 합동묘지도 파헤쳐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이후 40년간 금기시되었다.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것은 1993년 8월 28일 지역언론인 최승호·송병관 기자가 『경산향토신문』에 쓴 ‘향토기행’ 기사이다. 이들은 기사에서 “이 마을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쟁점의 하나인 양민학살사건의 발생지로 주목받고 있다. 마을 뒤 대원산에는 7개의 코발트광 갱구가 있는데 6·25 당시 수천 명의 양민이 학살, 매몰돼 최근까지 그 썩은 물이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향토사 차원에서도 이 사건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잊고 있었던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그리고 최승호는 동료들과 경산지역사 연구회를 조직하여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1995년 4월 2일 경산 향토신문사가 주최하고 경산지역사 연구회가 주관하는 제1회 경산지역 문화유적답사를 진행하면서 코발트 광산 현장에서 진혼제를 올렸고, 1996년 1월 이 행사를 경산시민모임으로 이관했다. 1996년 6월 제2회 경산지역 문화유적답사에서도 마지막 코스로 진혼제를 거행했다.

드디어 2000년 1월 코발트 광산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구성[위원장 장명수]하여 대구 경북 보도연맹학살피해자신고센터 창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학살자 경산유족회[공동회장 류운·이태준] 창립,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합동위령제 거행, 위령탑 설치, 역사공원 조성사업 전개 등 사업을 하나씩 진행해 갔다. 2000년 9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했다. 최승호 등은 1년 후인 2001년 3월에는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과 함께 수평 2굴 실제 발굴에 착수함으로써 20년간 막혀있던 수평 2굴의 갱도를 뚫고 유골이 묻혀 있음을 확인했다. 갱도 안에는 아직 탈골이 진행되고 있는 유골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제작팀 등은 육안으로 봐도 수백 구가 넘는 유골[당시 유골 수습은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담당]을 수습했고, 이 중 40여 구 유골들을 연세대학교 법의학팀에 맡겨서 감식한 결과 나이는 10대에서 50대까지, 유골에서는 총상흔, 외상흔, 화염흔이 나타났다.

2002년 9월 경산시의회가 전국기초의회로는 세 번째로 유족의 청원을 받아들여 ‘코발트 광산 청원심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코발트 광산의 학살이 사실이었음을 밝히고 국회에 ‘코발트 광산 민간인학살 특별법’을 청원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경산 유족들은 갱도를 제외한 평산동 대원골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여 유골과 유류품 20여 점을 수습하였다. 유족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국회 등에 유골 발굴과 안장, 특별법 제정을 거듭 촉구했지만 2005년 5월 당초 통합특별법과는 거리가 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17대 국회를 통과했다. 유해발굴은 2007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진행되었으며 첫해인 2007년 수평굴에 방치된 유해 수습, 2008년 수직굴의 유해 확인 순으로 진행되었다. 유해는 갱도 내인 수평 1굴[40구], 2굴[2001년 40구, 2007년 120구]과 수직 2굴[2005년 3구], 그리고 광산 외부인 대원골[31구] 등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유족들의 보존요청에도 아랑곳없이 대원골 현장은 골프장 조성계획에 밀려 사라져 버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2009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363구의 유해를 발굴한 뒤 2009년 11월 이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 희생자를 1,800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대법원은 이와 함께 대구·경북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군위·경주·대구 국민 보도연맹사건, 경북·영천 국민 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이전 경산 민간인 희생 사건, 대구·고령·성주·영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6건의 학살사건의 국가 책임도 인정해 310여 명의 희생자 유가족에게 117억여 원의 손해배상금을 주라고 판결했다. 진실화해위가 추정한 6건의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는 5,000여 명에 달한다.

[잃어버린 기억, 끝나지 않은 해원(解冤)]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경산시의회가 코발트 광산 청원심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회에 ‘코발트 광산 민간인학살 특별법’을 청원하고, 66년 만에 국가의 책임 인정을 이끌어낸 일련의 과정에는 유족의 피땀과 함께, 30년 가까이 ‘향토 역사의 기억화’에 매달려온 향토 신문기자 최승호 및 경산 지역사연구회 사람들의 노고가 매우 컸다.

경산시와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에서는 2013년부터 예산 7억 9천만 원을 확보하여 현장을 보존하고 진입로 개설, 안내판 설치, 관람 데크 조성 등을 통해 이 일대를 코발트 광산 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2016년 11월에는 위령탑이 세워졌다. 위령탑에는 경산 78명, 청도 43명 등 희생자 127명의 이름, 미확인 유해 1,600명이라는 숫자와 함께 “영령들이여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묵은 한을 푸시고 평안히 영면하시어 극락왕생하옵소서”라는 유족회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억울하게 사라져 간 희생자들에게 이 발원문이 언제쯤이면 제대로 닿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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