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08
한자 慶山-古代王國押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방용철

[정의]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 번성하였던 초기 국가 압독국의 정치와 문화.

[개설]

압독국(押督國)은 지금의 경산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삼한시대 초기 국가이다. 금호강·청통천·오목천·남천 등의 풍부한 수자원과 경북 지역 내 가장 넓은 충적평야에서 비롯된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압독국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압독국이 형성된 경산 지역은 금호강 수계를 따라 동쪽의 경주·영천과 서쪽의 대구·낙동강 본류를 연결하는 교통로상 결절점이다. 때문에 일찍부터 문물 교류의 중심지로 인간집단의 왕래와 경제력 축적이 용이했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을 기반으로 압독국금호강남천 사이의 넓은 들판 및 구릉 일대에 국읍(國邑)을 형성하였으며,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 전역과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욱수동·노변동 일대, 동구의 불로동·안심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문헌사료에는 2세기 무렵 압독국이 신라에 편입되었던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고고학 연구에 따라 실제로는 4세기 무렵에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압독국 수장층의 자치권이 유지되었다고 이해된다.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는 압독군 혹은 압량군으로 개정되었으며, 경주 지역에서 서쪽 방면을 왕래하는 군사적·경제적 관문(關門)으로 기능을 유지하였다.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교통로의 요충지 압독국]

경산 지역은 지형상 대구분지(大邱盆地)의 동쪽에 위치하면서, 동-서로 금호강이 관류하는 아분지(亞盆地) 형태이다. 북쪽 전역에 걸쳐 거대한 팔공산괴(八公山塊)가 병풍과 같은 형상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역시 비슬산괴(琵瑟山塊)와 성현산괴(省峴山塊)가 높은 산지를 형성하여 다른 지역과 경계를 이룬다. 이에 따라 중앙부를 동서로 관류하는 금호강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었다. 금호강 양안에 평균 2~2.5㎞ 폭으로 형성된 충적평야는 금호강의 유로이동과 범람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경상북도 제1평야로 금호평야라 칭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상류 방면의 청통천 유역과 하류 방면의 남천 유역에 상당한 규모의 충적평야는 농경활동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더욱이 경산 지역에는 현재 326개의 저수지가 집계될 만큼 일찍부터 수리시설 축조 또한 활발하였으므로 풍부한 수량과 넓은 충적평야를 바탕으로 높은 농업생산력을 보였다. 이렇게 풍부한 자연자원과 생산력을 기반으로 경산 지역에는 청동기시대부터 많은 인간 집단이 모여들고, 고대 사회의 원형이 되는 청동기 문화를 이룩하였다.

현재까지 경산 지역에는 총 253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대략 300여 기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북도 내륙지역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고인돌 개수는 압독국이 등장하기 직전 단계의 지역 내 역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표가 된다. 2019년에 발굴조사된 와촌면 소월리의 유적 출토 목간(木簡)[경산 소월리 목간] 또한 현재까지 확인된 신라사 최초의 토지현황 조사와 결부(結負) 실시 등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례로서 압독군의 농업생산력을 잘 보여준다.

한편 경산 지역은 금호강 수계를 따라 서쪽으로는 대구·낙동강, 동쪽으로는 영천·경주로 연결되며, 청통천을 따라 북쪽의 군위로, 남천을 따라 남쪽의 청도 방면으로 왕래할 수 있는 교통로상 요충지이다. 특히 금호강은 경북 포항시에서 발원하여 영천·경산·대구를 관류한 후 낙동강에 연결되는데, 경산 지역은 금호강 중류 지역에 위치하는 만큼 고대에는 수상 유통망의 거점으로써 여러 지역 간의 교역활동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압독국 세력의 토기 유통망 형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경산시의 옥산동과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일대에는 신라의 영역 내에서 경주 지역을 제외한 가장 큰 규모[총 41기]의 가마 유적이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 곳 토기 공방(工房)에서 대량생산된 토기는 압독국 전역에 보급된 것은 물론 대구에 위치한 괴전동 고분군, 복현동 고분군, 성산리 고분군, 문양리 고분군 등 금호강 유역의 수많은 고분에 함께 부장되었다. 압독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토기들이 금호강 최하류 유역까지 유통되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2016년에 발굴 조사된 하양읍 양지리의 목관묘에서는 중국 한(漢)나라의 오수전(五銖錢) 26개가 장식되어 있는 기원 전후의 꺽창집이 출토되어 압독국의 대외 교역망과 경제력 축적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단서로 주목받고 있다. 그 외 임당동 고분군에서 다량 출토되는 상어뼈 및 조개 껍데기 등을 통해서도 일상적으로 해안 지역과 교역하였던 압독국 세력의 유통망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고대의 고분 문화를 대표하는 임당동 고분군]

임당유적은 1922년 간행된 『1918년도 고적조사보고(古蹟調査報告)』 제1책에 고분군이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1982년에 처음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넓게는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조영동, 압량읍부적리신대리 일대에 걸쳐 형성된 고분군과 환호(環濠) 및 토성(土城) 등의 방어시설, 고대인들의 생활모습이 남겨진 주거지, 생활폐기물이 쌓여있는 저습지 유적까지 포괄하는 복합유적에 해당한다. 특히 임당동 고분군은 고대 신라 권역에서는 극히 드물게 기원전 2세기 무렵의 널무덤에서부터 2~3세기 무렵의 덧널무덤, 4세기 무렵의 고총고분인 돌무지덧널무덤과 암반굴착덧널무덤, 6~7세기 무렵의 돌방무덤까지 모든 단계의 묘제가 확인된다. 널무덤과 덧널무덤들은 유적의 동쪽과 중앙부, 서쪽 등에서 골고루 확인되지만 고총고분 단계로 발전하면서 대형무덤은 중소형무덤과 구별하여 입지가 탁월한 지형에 자리 잡는 한편, 대형무덤들만의 묘역(墓域)을 독점하는 경향성이 보인다. 반면 마지막 돌방무덤은 유적의 동쪽에만 축조되는 특징도 나타난다. 이러한 고분군의 축조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은 압독국 지배층의 장례문화나 사후관념 및 정치경제적 발전과정 등을 시간적 단절 없이 추적 및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한반도 남부지방의 철기문화는 늦어도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널리 보급되었다고 이해되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근거가 널무덤에 부장된 후기 양식의 청동기와 일부 철기 유물이다. 임당동 고분군에서는 약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널무덤이 축조되었는데, 주로 목판을 조합해 관을 만들었지만 일부에서는 통나무를 그대로 쓰기도 하였다. 영남 지방의 널무덤 유적에서는 대체로 무덤들 사이의 규모나 입지 등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신락(臣樂)’이라는 명문(銘文)이 주조된 원통형의 동기(銅器), 세련된 세형동검과 오수전·칠기(漆器)·한경(漢鏡) 등의 유물을 통해 임당동 고분군 축조 집단에서 권력자의 출현을 일부 엿 볼 수 있다.

두 번째 묘제로 채택되었던 덧널무덤은 대체로 2세기 중엽부터 4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졌다. 덧널무덤은 임당동 구릉지의 능선 정상부와 그 주변에 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전의 널무덤과 구별된 구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덧널무덤은 모두 반지하식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대형 덧널무덤의 경우에는 지름이 6m 이상으로 커진다. 덧널무덤에는 권력자들이 착용하였던 갑주(甲胄)와 대도(大刀)가 부장되는가 하면, 순장(殉葬)한 흔적도 다수 확인되는데, 권력자의 출현은 물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주목된다. 3세기말 무렵부터는 경주식 덧널무덤으로 불리는 좁고 긴 평면형태의 덧널무덤이 등장하는데, 신라 양식의 토기와 함께 비취곡옥 등 사치품이 함께 묻혀있어, 압독국과 사로국 단계의 신라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속하는 임당동 저습지 유적에서는 동물의 뼈로 점을 치던 복골(卜骨)이 출토되어 압독국 사람들의 흥미로운 풍속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세 번째 묘제는 4세기 중엽부터 등장하는 고총고분의 시작, 바로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일반적으로 신라 중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덤 주인공을 배경으로 조영되는데, 임당동 고분군에서 수량은 많지 않지만 압독국의 초기 고총 문화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화려한 사치품의 비중이 증가하며, 특히 비취곡옥과 금공품 수량이 많아지는 경향은 압독국의 지배층이 신라의 강력한 지배 아래 상하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다만 돌무지덧널무덤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수량도 많지 않은데, 곧 압독국 세력만의 고유한 무덤양식인 암반굴착덧널무덤으로 교체되었다. 곧이어 등장한 암반굴착덧널무덤은 압독국 고유의 고총 문화를 대표하는 무덤 양식으로 주목된다. 암반굴착덧널무덤은 앞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하는 방식과 구덩식돌덧널무덤 축조 방식의 일부 요소를 받아들여 5세기 무렵에 새롭게 등장하였다. 최근까지 발굴 조사된 결과를 종합하면 임당동 고분군의 고총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암반굴착덧널무덤은 압독국 수장층 사이에서만 유행하던 전통 묘제로 추측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묘제는 돌방무덤이다. 이 무렵 앞 시기와 같은 대형무덤은 사라지고, 최대 직경 15m 내외의 중형무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출입시설의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구분되며, 양쪽 모두 완전한 신라 형식의 토기가 묻히는 반면, 무구류(武具類)와 마구(馬具)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신라가 압독국에 대한 간접지배를 끝마치고,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군사를 주둔하는 등 복속지를 직접적으로 장악 및 지배한 결과가 무덤 양식에도 큰 변화를 준 것으로 이해된다.

[숨겨져 있던 압독국의 새로운 면모]

1. 초기 압독국의 최고 수장층 무덤 - 양지리 널무덤

2017년에 발굴 조사된 경산 양지리 유적은 금호강 중류의 북안에 위치한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환호, 초기 철기 시대의 독널무덤과 주거지, 삼국 시대의 토기가마와 돌덧널무덤·돌방무덤 등이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기원 전후 만들어진 1호 널무덤이다. 1호 널무덤은 길이 273㎝, 너비 84㎝ 정도의 통나무널로 축조되었다. 토기는 3점에 불과하지만 납작쇠도끼·세형동검·철검 등과 함께 청동거울·청동방울·청동말꾸미개와 3점의 부채자루 등이 출토되었다. 금호강 유역에서는 최초로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대표적인 청동거울인 성운문경(星雲文鏡)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무덤 바닥의 가운데에 네모꼴의 요갱(腰坑)이 확인되었는데, 옻칠을 한 함(漆函)과 청동투겁창 2점, 꺽창집, 쇠투겁창 등이 발견되어 획기적 발굴성과로 주목받고 있다.

요갱에서 출토된 청동투겁창 2점은 옻칠 처리된 창집[漆鉾鞘]과 세트로 구성되었고, 역시 옻칠 처리된 꺽창집[漆戈鞘] 겉면은 26점의 오수전이 장식으로 박혀있다. 한경과 오수전 등은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낙랑군(樂浪郡)과 진한·변한 소국들의 교역을 대표하는 유물로 손꼽힌다. 다만 오수전과 같은 동전류는 화폐라기보다 중국 세력과의 교역을 상징하는 위세품으로서의 의미가 커 일반적으로는 1~3점 정도의 소량만 출토된다. 양지리 널무덤에서 출토된 꺽창집에 26점의 오수전이 장식되었다는 점이나 기타 무기 갖춤 등이 모두 최고급 수준이라는 점은 기원 전후 압독국 최고수장층의 권력과 경제력 축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삼국시대 이전 진한 소국 단계의 한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2. 압독국 땅에 묻힌 사람들 - 259개체의 인골

압독국의 번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에서는 총 259구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임당유적의 고총고분을 발굴 조사하였던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는 2012년부터 이 인골 자료를 분석하여 연령과 성별, 병리학적 특징 등을 추출하였다. 매장된 사람의 계층과 성별, 연령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인골이 확보된 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만큼 학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259개체의 인골 중에는 21~35세로 분류되는 성인이 64개체로 가장 많았고, 1~3세로 분류되는 유아 인골도 6개체나 되었다. 총 31개체는 대략 신장을 추정할 수 있는데, 남성의 경우 165~167㎝ 정도에 이른다.

한편, 여러 인골들 중에는 퇴행성관절염·외골막염·등뼈앞굽음증·결핵·과골화증·치아결실·충치 등이 다수 확인되어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질환을 겪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1~35세로 분류되는 한 여성 인골은 10개월 남짓 성장한 태아 뼈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출산에 임박하였거나 전후한 시점에 함께 사망한 사례로 짐작된다. 고대 사회의 출산 사망 사고를 고고학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희소한 사례이다. 최근에는 인골의 DNA 분석을 통해 36~50세로 분류되는 남성과 10세 전후의 어린 여성이 부모·자식으로 함께 순장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인골 자료 분석은 압독국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는 귀중한 성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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