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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31
한자 申休
영어공식명칭 Shin Hyu
분야 종교/유교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796년 - 동서리 효자각 건립
거주|이주지 하양현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동서리 효자각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산2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평산(平山)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효자.

[개설]

신휴(申休)[?~?]는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출신의 효자로 조정에 의해 정려(旌閭)되었다. 신휴의 효행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되어 있으며, 효자각(孝子閣)이 세워져 있다.

[가계]

신휴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가계나 활동 시기는 전하지 않는다.

[활동 사항]

신휴는 관직으로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따르면, 병이 난 아버지의 증세를 살피기 위해 직접 변을 맛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극진하게 상사를 치렀으며, 효행이 널리 알려져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또한, 『화성지(花城誌)』 등의 읍지에는 실기(實記)를 바탕으로 신휴의 어린 시절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신휴는 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참의공(參議公)이 무고를 당하여 강화도로 귀양 가게 되어 10여 년간 계모(繼母)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집안의 재산을 탐내던 계모는 남편의 편지를 위조하여 신휴에게 보여주었다. 편지에는 자신의 병이 심해져 사람의 눈을 먹으면 낳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에 신휴는 자신의 한 쪽 눈을 뽑아 계모에게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계모는 다시 위조된 편지를 신휴에게 보여주었는데, 눈을 복용하여 차도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신휴는 즉시 다른 한 쪽 눈도 뽑아 계모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후 계모의 박대가 심해져 결국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아버지의 적소(謫所)로 향하였다.

길을 가던 신휴는 밤이 깊어지자 바위에 앉아 소매에 두었던 퉁소를 꺼내 불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하였다. 마침 근처에 있던 심참의(沈參議)가 신휴의 사정을 듣고 몇 달을 거두어 주었고, 노잣돈을 챙겨주었다. 그러나 신휴는 도적들을 만나 노잣돈을 모두 빼앗긴다. 상심한 신휴는 바위에 앉아 퉁소를 불었는데, 마침 귀양지에서 풀려나 근처에 머물고 있던 아버지가 퉁소 소리를 듣고 신휴와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간의 사정을 들은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계모를 죽이려 하였으나, 신휴가 울면서 말리기에 죽이지 못하였다. 곧 신휴의 눈을 찾았는데, 상자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이에 큰 잔치를 열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곡절을 말하니, 듣는 이 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눈물을 모아 상자 안의 눈알을 씻은 뒤 다시 눈에 넣으니 예전 같이 앞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617년(광해군 9)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신휴상분(申休嘗糞)」 편에는 신휴의 효행이 소개되어 있다. 신휴가 정려되고 효자비가 세워졌으나, 시간이 흘러 퇴락하였다. 이에 1796년(정조 20)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부임한 박명섭(朴命燮)이 흩어져 있던 고을의 효자 윤인후(尹仁厚)·허중견(許仲堅)의 효자비와 신휴의 효자비를 수습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에 효자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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