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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57
한자 許周
영어공식명칭 Heo Ju
이칭/별칭 백방(伯方),백공(伯公),숙재(肅齋),간숙공(簡肅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9년연표보기 - 허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85년 - 허주 지양주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허주 지안성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90년 - 허주 경기 우도 염문계정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97년 - 허주 노비변정도감 도총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399년 - 허주 지형조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01년 - 허주 경상도 안렴출척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05년 - 허주 형조참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10년 - 허주 참지의정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16년 - 허주 개성 유후사 유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23년 - 허주 판한성부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40년연표보기 - 허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42년 - 허주 영의정 증직
추모 시기/일시 1951년 - 허주 정산서원 제향
묘소|단소 허주 묘소 - 북한 개성특별시[옛 경기도 풍덕현 채련동 태산]
사당|배향지 허주 제향지 -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정취길 80-21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하양
대표 관직 판한성부사

[정의]

조선 전기 하양이 관향인 문신.

[개설]

허주(許周)[1359~1440]는 고려 말 지양주사(知襄州事)로 있으면서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고,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 개혁에 참여하였다. 조선 개창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오른 후 관직을 그만 두었다.

[가계]

허주의 자는 백방(伯方)·백공(伯公), 호는 숙재(肅齋), 시호는 간숙(簡肅)이다. 아버지는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허귀룡(許貴龍), 어머니는 통례문 부사(通禮門府使)를 지낸 이길(李吉)의 딸 흥양이씨(興陽李氏), 할아버지는 도관 정랑(都官正郎)을 지낸 허윤창(許允昌), 증조할아버지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허수(許綏)이다. 족보에는 부인이 정부인(貞夫人) 합천이씨(陜川李氏)로 나오지만, 『세종실록』에 수록된 졸기(卒記)에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최재(崔宰)가 장인이라 되어 있다. 허주·허조(許稠)·허척(許倜) 삼형제가 모두 현달하면서, 이 가문은 조선 초 명문거족(名門巨族)이 되었다.

[활동 사항]

허주경상도 하양현 출신이다. 고려 말 음보(蔭補)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이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법 정랑(典法正郎) 재임 중 노비 소유권 문제로 소송을 일으켰던 권신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권신은 정방 제조(政房提調)에 오르자, 허주를 파면시켰다. 1385년(우왕 11) 지양주사로 부임하였는데, 왜구 때문에 산으로 도망친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읍성(邑城)을 쌓았다. 1388년(우왕 14) 지안성군사(知安城郡事)로 부임하였고, 개성 소윤(開城少尹)을 거쳐 1390년(공양왕 2) 사헌장령(司憲掌令)·공부 총랑(工部摠郞)에 올랐다. 같은 해 전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하여 경기 우도 염문계정사(京畿右道廉問計定使)로 파견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창되자 내부경(內府卿)에 제수되었다. 1397년(태조 6)에는 사헌중승(司憲中丞)을 겸직하였다. 1397년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이 설치되어 경외(京外)의 쟁송을 판결하게 했는데, 허주가 도청사(都廳使)를 맡아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였다. 1399년(정종 1) 노비변정도감 폐지 이후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지형조사(知刑曹事)로 승진하였다. 지형조사로 있으면서 판결을 공명하게 했는데, 세도가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아 파직당하기도 했다.

1401년(태종 1) 경상도 안렴출척사(慶尙道按廉黜陟事)로 파견되었지만, 새로 개간한 토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양주로 유배당하였다. 1405년(태종 5) 형조 참의(刑曹參議), 1406년(태종 6) 호조 좌참의(戶曹左參議), 판홍주목사(判洪州牧事)에 임명되었다. 1410년(태종 10) 참지 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한성 부윤(漢城府尹)·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제수되었는데, 병환으로 거듭 사직하였다. 1423년(세종 5) 판한성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430년(세종 12) 공법(貢法) 논의에 참여하였고, 1433년(세종 15) 국왕은 허주를 위해 기영회(耆英會)를 열어 주었다.

허주는 사직한 후에도 동생 허조와 정사를 자주 논의하였다. 허조는 새벽 첫 닭이 울면 형의 집에 가서 인사했는데, 그때마다 허주는 의관(衣冠)을 하고 동생을 기다렸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하루 동안 조회를 중단하였으며, 부의(賻儀)를 내려주었다.

[학문과 저술]

허주는 어려서부터 시명(詩名)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허주가 남긴 시문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성리설(性理說)을 열심히 공부하여 주위에서는 안향(安珦)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는데, 안향은 증조할아버지 허수의 장인이다. 의례는 항상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고 한다.

[묘소]

허주의 묘소는 경기도 풍덕현(豐德縣) 채련동(採蓮洞) 태산(兌山)[지금의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다.

[상훈과 추모]

허주는 ‘간숙(簡肅)’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442년(세종 24)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1951년 함양 정산서원(井山書院)[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정취길 80-21]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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