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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009
한자 三聖賢-精神-慶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미선

[정의]

원효·설총·일연 세 성현의 출생지로서 한국의 정신문화와 외래사상의 융합이라는 업적을 계승하여 복합 문화도시로 발전하는 경산.

[개설]

경산은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교통의 요지로서 선사(先史)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경북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고장이며,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압독국(押督國)이 건국되어 역사·문화적 역량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경산에서는 한국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삼국통일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던 원효(元曉), 유학 경전을 널리 보급할 수 있도록 이두(吏讀)를 창안하였던 한국 유학의 비조(鼻祖)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삼국유사(三國遺事)』 저술을 통해 한국의 자주적인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린 일연(一然) 등이 출생 및 성장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현재 경산은 13개 대학교와 10만 명의 대학생이 있는 연구학원(硏究學園)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 배경에는 분명 경산 지역에 세 성현, 즉 삼성현(三聖賢)의 얼이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경산 사람들은 삼성현의 활동과 자취를 수집 및 정비하고, 정신문화 유산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삼성현(三聖賢)의 삶과 경산]

1. 원효의 탄생과 압량군 불지촌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으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는 신라의 17관등 중 제11위인 나마(奈麻) 관등의 담내(談㮈) 혹은 담날(談捺)이다. 할아버지 잉피공이 13세기 후반까지도 적대연(赤大淵) 옆 사당에 모셔졌었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오랫동안 추앙한 위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출생지는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 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원효압량군(押梁郡) 남쪽의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원효가 태어난 인연으로 마을을 ‘불지’라고 하였는데, 불지촌은 이후 자인현(慈仁縣)에 속한다고 했다. 또한 태어난 사연이 깃든 나무를 사라수, 그 나무에서 나는 밤을 사라밤[裟羅栗], 나무 옆에 지은 절을 사라사(裟羅寺)라고 불렀다. 먼 옛날 부처가 사라수 아래에서 열반했음을 고려하면 많은 신라인들이 원효를 얼마나 존숭(尊崇)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압량군 불지촌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원효의 아명은 서당(誓幢)이고, 제명(第名)은 신당(新幢)이라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따로 스승이 없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따르면 15세 즈음에 출가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압량군 불지촌에서 성장하였겠지만 출가하면서 고향을 떠났을 것이다. 나중에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태어났던 밤나무 옆에도 절을 짓고 ‘사라사’라고 했다. 원효가 자신의 고향에 사찰을 창건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하는 한편 도량으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의 행적이 잘 남아있는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에는 “대사(大師)는 초개(初盖)에 있으면서 현풍(玄風)의 큰 장인(大匠)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고유명사의 표기에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집을 희사하였던 초개사에 머무르며 심도 있는 저술 활동을 했다고 생각된다. 압량군 지역이 단순히 원효의 고향으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학문의 발전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2. 설총의 삶과 경산

설총의 탄생은 아버지인 원효의 파계(破戒) 설화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느 날 원효가 거리에서 노래 부르기를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태종(太宗)이 듣고서 “이 선사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시는 듯하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요석궁(瑤石宮)에 홀로 살고 있던 공주(公主)에게 원효를 머물게 하니 과연 설총이 태어났다. 설화에 따르면 어머니는 왕족이니 진골(眞骨)이지만 부계에 따라 육두품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관례(慣例)대로는 아버지의 고향을 1세대 고향으로 따른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설총의 고향 역시 압량군으로 인식되었을 여지가 있다.

설총의 출생과 가계(家系) 이외에 삶의 전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단지 신라의 말[방언(方言)]로 유학 경전을 읽으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므로 학자들이 높이 받들었다는 것과 신라의 말로 중국과 신라의 지방 풍속과 문물을 막힘없이 알고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해석하니 해동에서 명경(明經)을 전문으로 하는 자가 전수하여 끊어지지 않는다는 정도의 평가를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학문 활동에 더하여 설총은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의 가까이에서 「화왕계(花王戒)」를 이야기 했다는 행적이 전한다. 그렇다면 설총의 주요 활동지는 분명 신라의 수도 경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 후기 이후 경산 지역의 유림들은 설총을 경산 사람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설총은 문묘(文廟)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이자, 우리나라 유학의 종주(宗主)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따라서 설총 추숭에는 경산 유학의 오랜 연원을 바탕으로 지역 문화의 자긍심을 높이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3. 일연의 삶과 그의 고향 장산(章山)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으로 자(字)는 회연(晦然)인데,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고쳤다. 1206년에 당시 경주의 속군(屬郡)이었던 장산군(章山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언필(金彦弼)이라 하는데,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일연이 국사(國師)가 된 덕분에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이(李)씨로 역시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에 봉해졌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경산 지역의 토성(土姓)으로는 김(金)·전(全)·백(白)씨가 있었다. 일연의 집안이 호장층(戶長層)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아버지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아들인 일연은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1227년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아버지 김언필은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지위였다고 생각된다. 지역에서 호장(戶長)의 자식은 아버지의 직역을 승계해야 하므로, 출가나 승과 등의 지위 변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연선사의 탄생은 범상치 않은 태몽에서 시작되었다. 태양이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빛 무리가 어머니 배를 비추는 꿈을 3일 밤이나 꾼 후에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거룩한 인물이 태어남을 일찍부터 암시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일연의 어릴 적 평가는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나게 고매하고, 자태와 행동은 단정하였으며, 큰 콧마루에 묵언의 입매가 돋보였다”이다. 또한 걸음걸이는 소가 걷는 듯 진중하고, 눈빛은 호랑이처럼 강렬하여 어릴 때부터 남다른 뜻이 있었다고 했다. 9세 때 지금의 광주 지역에 있었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기 시작하였고, 5년 후에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대웅선사(大雄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따라서 유년기를 보냈던 장산군에서의 활동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283년(충렬왕 9)에 국사(國師)의 지위가 되었지만 노모(老母)를 봉양하고자 고향인 장산군으로 돌아가기를 청한 사실이 확인된다. 승려가 세속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 여러 사람이 찬탄했다고 한다. 일연의 효심이 깊고 인간적 감성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만큼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리라 생각된다.

[경산에 남겨진 삼성현의 자취]

1. 원효의 자취

『삼국유사』의 「원효불기」 편에 원효의 본가(本家)가 있는 마을을 불지라고 불렀으며, 당시까지는 자인현에 속한 마을이라고 했다. 불지에 대해서는 지금의 경산시 여천동, 또는 압량읍 신월리자인면 북사리라는 설이 있다. 원효가 태어났다는 율곡, 원효가 살던 집에 세웠다는 초개사, 원효가 태어난 사라수 주변에 세웠다는 사라사(裟羅寺) 등이 또한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밖에 『자인읍지(慈仁邑誌)』에는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금당사(金堂寺)와 성제암(聖齊庵) 등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의 여천동에는 불당골로 불리는 골짜기 내에 신림사지(新林寺址)로 전해지는 곳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 남아 있던 석등과 탑재 일부는 사라졌고, 일부는 경산중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았다. 『자인읍지』에 따르면 신문왕 때에 원효가 창건한 금당사를 17세기에 백양(白楊)이라는 승려가 고쳐 신림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유곡동에는 원효사(元曉寺)로 불리던 초개사가 있는데, 사찰 안팎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석재편과 기와편 등이 다량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설총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북사리에 위치해 있는 제석사(帝釋寺)를 원효가 세운 사라사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한국사찰전서』에서는 지금의 제석사로부터 3㎞ 가량 떨어져 있는 도천산의 절터가 제석암이라고 했다. 한편, 팔공산 자락인 와촌면 강학리불굴사(佛窟寺)에는 원효가 수도 생활하였다는 원효굴(元曉窟)이 있으며, 대한리에는 원효암(元曉庵)이 남아 있다.

2. 설총의 자취

지금의 경산시 유곡동 지름골마을 일대는 원효설총에 관한 설화가 많이 구전되고 있다. 구전은 대체로 설총이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학업을 쌓았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유곡동에는 원효사로 불리던 초개사가 있으며, 여기에는 1926년 건립된 홍유후설선생신도비(弘儒侯薛先生神道碑)가 남아있다. 남산면 하대리에는 설총을 기리기 위해 1864년에 조성한 도동단(道東壇)과 1923년에 세운 도동재(道東齋)가 있다. 도동재는 2010년 규모를 확장하여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편액하였다. 현재 도동서원에서는 매년 가을에 설총을 향사 지낸다. 또한 단소 옆에는 초개사 것을 본 떠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3. 일연의 자취

경산 지역에 현전하는 일연 관련 유적은 없다. 기록을 통해 일연이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구전에 의하면 삼성산 기슭인 남산면 일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삼성현 현창 사업의 오늘,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에서 탄생한 세 성현의 위대한 업적과 심오한 정신적 가치는 다양한 종류의 현창 사업을 통해 지역민들 사이에 계승되고 있다. 제석사에서 매년 단오에 시행하는 원효성사 다례제(茶禮祭), 도동재[도동서원]에서 매년 거행되는 향사는 대표적인 지역 내 삼성현 추모 행사로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경산시에서는 삼성현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메시지를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삼성현역사문화공원삼성현역사문화관을 건립 및 운영하고 있다. 2015년 4월 30일에 개관한 삼성현역사문화공원삼성현역사문화관은 문화유산의 수집과 전시는 물론 다양한 체험 및 휴게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은 262.462㎡의 드넓은 면적에 이야기 정원, 어린이 놀이터, 미로원, 중앙광장, 야외공연장, 삼성현역사문화관, 둘레길, 레일썰매장, 국궁장, 오도체험장, 무궁화동산, 유아숲체험원까지 갖춘 지역 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삼성현의 업적과 문화유산을 단순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온가족이 공감하고 이야기하는 장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삼성현역사문화관삼성현역사문화공원의 핵심적 비중을 차지하는 전시관으로 2015년 4월 30일에 개관하여, 그 해 11월에는 전문 1종 박물관으로 등록하였다. 그리고 ‘원효-동아시아 불교의 새벽을 밝히다’, ‘설총-한국 유학의 시초가 되다’, ‘일연-지혜의 눈으로 민족을 바라보다’라는 주제로 삼성현의 문화유산을 전시하였다. 여기에 더해 영상자료실, 체험 공간인 온가족실, 기획전시실과 아카이브를 갖추어 놓아, 경산 시민의 문화의식을 고취시키고 삼성현의 정신적 가치를 전달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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