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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동 태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56
한자 新安洞胎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서하로 48-25[용봉동 1004-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노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 광주광역시 북구 서하로 48-25[용봉동 1004-4]지도보기
원소재지 태봉산 -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198[신안동 121-2]지도보기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에 있었던 인조의 넷째아들 용성대군의 태를 묻은 곳.

[개설]

태실(胎室)이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말하며, 태를 묻은 산을 태봉산이라 불렀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태를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높고 낮음에 따라 달랐다. 특히, 왕실에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해서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왕자나 공주 등 왕족의 경우는 돌로 방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위치]

신안동 태실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

[현황]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무등로 일대에는 높이 50여m의 조그마한 동산이 있었다. 이 동산이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고 해서 붙여진 태봉산이다. 1872년에 제작된 「광주목지도」에는 태봉산이 그려져 있는데 옆에 ‘고려왕자태봉(高麗王子胎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광주목지도」를 제작할 당시 사람들은 태의 실체를 잘 몰랐고, 그래서 막연히 고려 왕자의 태가 묻힌 곳으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온전히 밝혀진 것은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28년 전라도 광주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태봉산 일대의 서방면 중흥리와 신안리, 태봉리 주민들은 가뭄의 원인이 성스러운 태봉산에 누군가 시신을 암매장하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부녀자들이 호미를 들고 태봉산에 올라가 암장한 무덤을 파헤쳤다. 이때 돌로 된 태실(胎室)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백자 항아리를 포함 태지석(胎誌石), 금박(金箔)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기록한 지석이 나오면서 태봉산이라고 부르게 된 정확한 연유를 확인하게 되었다.

주인공의 정보를 담고 있는 지석에는 “황명천계4년9월초삼일진시탄생 왕남대군아지씨태 천계 5년3월25일장(皇明天啓四年九月初三日辰時誕生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태의 주인공이 태어난 천계(天啓)[명나라 희종이 1621부터 1627년까지 사용한 연호] 4년은 인조가 즉위한 지 2년째 되는 1624년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난 해이다. 지석에 적힌 글을 해석하면 “1624년 9월 3일 진시에 태어난 왕남대군 아기씨의 태를 이듬해인 1625년 3월 25일에 묻었다.”라는 내용이다. 인조는 인열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올라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1619년, 인평대군은 1622년, 용성대군은 1624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신안동 태봉산에 묻힌 아기씨 대군은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이다.

용성대군의 태를 묻었던 태봉산은 1967~1968년도까지 토지구획 정리사업 지구에 편입된 후 헐렸고, 여기서 나온 흙과 자갈은 1㎞ 떨어진 경양방죽을 메우는 데 사용되었다. 태봉산이 있었던 신안동에는 ‘태봉산 유래비’가 서 있고, 태를 보관하였던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앞에 전시 중이다. 태실에서 출토된 백자 항아리와 태지석, 금박 등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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