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406
한자 吳繼洙
영어공식명칭 O Gyesu
이칭/별칭 중함,난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3년 8월 13일연표보기 - 오계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오계수 기우만 의병부대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오계수 의병장 김준·전수용을 도와 의병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1년 6월 28일 - 오계수 일본 천황의 은사금을 거절하여 헌병대에 구금
몰년 시기/일시 1915년 3월 1일연표보기 - 오계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34년 - 도림사 건립
출생지 도림마을 -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 도덕리
활동지 영사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곡길 170-30[명도동 507]지도보기
활동지 도림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림하길 33[도덕동]지도보기
묘소 도림마을 -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 도덕리
성격 의병|유학자
성별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의병.

[개설]

오계수(吳繼洙)[1843~1915]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이다. 1843년(헌종 9) 8월 13일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 도덕리 도림마을[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오갑선(吳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鄭氏)로 정시혁(鄭時爀)의 딸이다.

1895년(고종 32) 스승인 기정진(奇正鎭)으로부터 유학을 배우고, 후학들에게 이기 일물론(理氣一物論)을 설파하였다. 또한,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奇宇萬) 의병부대에 가담하였으며, 의병장 김준(金準)과 전수용(全垂鏞)을 도와 의병 활동을 이어갔으며, 일제가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주었으나 거절하였다. 후학들이 오계수의 문집을 모아 『난와유고(難窩遺稿)』를 간행하였다.

[활동 사항]

오계수는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용진산 서쪽 선영 아래 누벽(樓碧)이라는 작은 초가를 짓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위한 심학(心學)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27세 되던 해에 스승인 기정진은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 '난와'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기우만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1905년에는 의병장 김준과 전수용을 도와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1910년 일제는 국권을 침탈하고 지역의 덕망 있는 인사들을 친일파로 회유하기 위해 일본 천황이 내린 은사금(恩賜金)을 수령하도록 강요하였다. 1911년 6월 28일 오계수는 일본 천황이 내린 은사금을 수 차례 거절한 일로 전라남도 장성군 삼거리헌병대에 구금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오계수는 「각금실기(却金實記)」에서 나라가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데 선비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본 천황의 돈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 뒤 영사재(永思齋)에 들어가 충과 의를 실천하는 절의를 후학에게 가르쳤다. 오계수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는 본성이고, 기(氣)는 기형(器形)으로,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리와 같이 불리부잡(不離不雜)한 하나라는 일물론(一物論)을 주장하였다. 원근의 후학들이 따르면서 『난와선생문인록(難窩先生文人錄)』을 남겼다.

[저술 및 작품]

1916년에 간행된 『난와유고』오계수의 문집으로 17권 8책으로 간행된 목활자본이다. 오준선(吳駿善)·오정선(吳禎善)·오재수(吳在洙)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묘소]

전라남도 나주군 삼도면 도덕리 도림마을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34년 유림들의 발의로 기정진을 비롯하여 오계수, 오준선의 학덕을 기려 도림사(道林祠)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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