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신방직 광주1공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562
한자 日新紡織光州一工場
이칭/별칭 종연방적,가네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지명/시설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서림로 60[임동 100-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해체 시기/일시 2020년 11월 10일연표보기 - 일신방직 광주1공장 해체
최초 설립지 일신방직 광주1공장 - 광주광역시 북구 서림로 60[임동 100-1]
현 소재지 일신방직 광주1공장 - 광주광역시 북구 서림로 60[임동 100-1]지도보기
성격 기업체|공장
설립자 김형남
전화 062-600-5301
홈페이지 http://www.ilshin.co.kr/front/kor/main.do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에 있었던 섬유 제품 제조업체인 일신방직의 공장.

[개설]

일신방직의 전신은 전남방직이고 전남방직의 전신은 가네가후치[가네보] 방적 공장이다. 가네가후치 방적 공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풍부한 목화와 저렴한 인건비를 이용하기 위해 가네가후치가 광주에 설치한 제사 공장과 방직 공장이다. 가네보가 광주에 제사 공장을 둔 이유는 4가지였다. 첫째, 다른 제사 자본이 전라남도 지역에 진출하지 않아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전라남도가 누에고치 생산이 많아 값이 저렴하고 노임도 쌌기 때문이었다.

셋째, 광주가 목화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1830년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서유구는 『완영일록(完營日錄)』에 “광주는 산인지 밭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목화를 많이 재배한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화순 탄광과 인접하고, 광주천 상류에서 공급하는 농업용수가 풍부하다는 입지 조건 때문이었다. 가네보는 화순의 탄광 중 규모가 큰 무연 탄광 4개소를 매입하고, 방적 공장으로 이어지는 수송 철도를 부설해 공장 가동에 필요한 석탄을 안정적으로 공급하였다.

[변천]

일신방직 광주1공장은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일본의 방직업체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당시 방적기 3만 5000추, 직기 1,440대, 종업원 3,000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방적 공장이었고, 1945년 광복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정부 소유 전남방직 공사로 출범하였다. 이어 1951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전남방직주식회사로 민영화되었고, 1961년에는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분할되었다.

[현황]

일신방직 광주1공장은 2020년 11월 10일까지 생산을 중단하고 광주광역시 광산구 옥동평동일반산업단지에 2007년 3월에 지은 광주2공장과 일신베트남사업장으로 이전하였다. 공장 대지의 처리 문제를 놓고 부동산 개발 업체에 매각하려는 회사 측과 방직산업 메카인 공장 터를 개발하여 시민 편의와 공익성을 담보하는 쪽으로 활용하려는 광주시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일신방직 광주1공장은 면사, 혼방사 등을 생산하여 연간 269억 원 매출로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1935년 일본 방직업체가 설립한 공장이 모태로 시민에게는 일제 수탈의 아픔과 산업화 시기 여공들의 애환이 서린 근대 산업 문화유산으로 인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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