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49
한자 安在鴻
이칭/별칭 민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인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12월 30일연표보기 - 안재홍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1년 9월 - 안재홍 와세다 대학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2년 10월 - 안재홍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 조직
수학 시기/일시 1914년 - 안재홍 와세다 대학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5년 5월 - 안재홍 중앙학교 학감(學監) 재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 안재홍 대한민국청년외교단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4년 5월 - 안재홍 시대일보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24년 9월 - 안재홍 조선일보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9월 - 안재홍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15일 - 안재홍 신간회(新幹會)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2월 - 안재홍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 - 안재홍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안재홍 국민당(國民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6년 2월 - 안재홍 재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在南朝鮮國民代表民主議院) 대표위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 2월 - 안재홍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0년 5월 30일 - 안재홍 제2대 국회의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50년 9월 - 안재홍 납북
몰년 시기/일시 1965년 3월 1일연표보기 - 안재홍 사망
출생지 안재홍 출생지 - 경기도 진위군(振威郡)[현 평택시] 고덕면(古德面) 두릉리(杜陵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민정장관|국회의원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안재홍(安在鴻)[1891~1965]은 식민지시기 교육자·언론인·역사학자로서 민족운동에 헌신하여 모두 9차례 9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8·15해방 후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가계]

안재홍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91년 12월 30일[음 11월 30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현 평택시] 고덕면(古德面) 두릉리(杜陵里)에서 아버지 윤섭(允燮)과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9남매 가운데 2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07년 황성(皇城)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수학하면서 이상재(李商在) 등의 민족지사를 만났다. 1911년 9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며, 이해에 ‘민중의 세상’이란 뜻의 민세(民世)를 아호로 지었다.

1912년 10월 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7월 귀국하였으며, 1915년 5월부터 중앙학교의 학감(學監)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稧)에서 활동하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자 해직되었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비밀결사 대한민국청년외교단[1919년 6월 조직]에 가입하여 총무로 활동하다가 징역 3년을 받고 첫 옥고를 치렀다.

1924년 5월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활동을 시작한 뒤, 이해 9월에 조선일보의 주필 겸 이사로 입사하였다. 1926년 9월 홍명희(洪命熹) 등과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를 조직한 데 이어, 1927년 2월 15일 신간회(新幹會) 창립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서 신간회운동을 지도하였다. 1934년 들어 ‘조선학(朝鮮學)’을 천명하면서 ‘조선문화운동’을 제창하였고, 정인보(鄭寅普)와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하기 시작하여 1938년 간행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되어 100여 일간의 9번째 마지막 옥고를 치렀다.

8·15해방 당일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탈퇴하고, 이해 9월 신민족주의(新民族主義)를 제창하면서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였다. 1946년 2월 재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在南朝鮮國民代表民主議院)의 대표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이해 7월 좌우합작 교섭의 우측 대표로 선임되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관선의원(官選議員)으로 선임되었다. 1947년 2월 남조선과도정부의 민정장관에 취임하여 1948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1950년 5·30선거 때 고향인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기간 중인 1950년 9월 납북되었고, 1965년 3월 1일 평양 시내의 한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한민족의 기본진로』 등이 있다.

[묘소]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봉안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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